고려사

기황후: 공녀로 시작해 원 제국의 정후(正后)에 오르다

solutionadmin 2025. 9. 12. 14:47

 

황궁을 배경으로 비취 인장과 자정원 장부를 든 기황후(정후) 모습 / 이미지 출처: 작성자 직접 제작(AI 생성), 저작권 보유 © 2025

기황후: 공녀로 시작해 원 제국의 정후(正后)에 오르다

안녕하세요! '사람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사' 블로그 지기입니다.

오늘은 고려 후기, 한 평범한 여성이 어떻게 거대한 제국의 황후 자리에 오르고, 두 나라의 역사를 뒤흔들었는지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바로 기황후의 삶입니다.

 

혹시 "기황후"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권력을 향한 야망, 그리고 고향 고려를 배신한 비운의 여인이라는 복잡한 이미지가 아닐까 싶어요.

오늘은 그녀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가며,

"그녀는 어떻게 금기를 깼는가?", "그 대가는 누가 치렀는가?"를 함께 질문해 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기황후의 시대로 함께 떠나볼까요?

굴욕적인 시작: '공녀'라는 운명과 입궁 경로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고려는 참으로 힘겨운 시기였죠.

 

몽골의 간섭을 받으며 끊임없이 공녀(貢女)를 바쳐야 했습니다.

한 번에 수십 명씩 끌려갔고,

딸 가진 부모들은 조혼을 시키거나 심지어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는 등 눈물겨운 선택을 해야 했어요.

 

기황후도 이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 원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입궁 경로를 두고 학계에서는 두 가지 설이 병존해요.

첫째, 공녀로 끌려갔다는 설. 둘째,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와 같은 궁정 네트워크를 통해 발탁되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기황후가 고려의 유력 가문인 행주 기씨(幸州奇氏) 출신이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기자오, 오빠는 기철과 기원이었죠.

단순히 공녀였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그녀의 출신 가문과 궁정 내 인맥이 그녀에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회를 주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거예요.

권력의 계단: 제2황후에서 정후까지

원나라에 도착한 기황후는 운명의 여인, 황제 혜종을 만납니다.

혜종은 기황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고, 그녀의 지혜롭고 영리한 성품에 매료되었어요.

하지만 황제에게는 이미 정실 황후인 타나실리가 있었고, 그녀는 기황후를 무섭게 질투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1330년대 중반, 타나실리 일족이 역모로 몰락하면서 권력의 지형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기황후에게는 기회였죠.

황제는 그녀를 정후로 삼으려 했지만, 몽골 귀족들은 "외국인이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냐"며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기황후는 결국 재상 바얀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1340년 제2황후에 책봉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1338년 황자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아 황실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 기황후는,

자신의 사람들을 심기 시작합니다.

 

황후 부속기관을 자정원으로 개편하고, 고용보를 비롯한 고려인 환관과 관료들을 핵심 요직에 앉혔죠.

재정은 물론 인사, 심지어 군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원나라의 실세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1365년, 마침내 전례를 깨고 제1황후(정후) 자리에 오르며 권력의 정점을 찍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 내 치열한 표 대결과 파벌 싸움을 거쳐 이사회의 신임을 얻은 셈이죠.

고려에 미친 영향: 공(功)과 과(過)

기황후의 성공은 고향 고려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오빠 기철은 동생의 힘을 등에 업고 고려에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는 권문세족이 되었어요.

이들은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고 무고한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등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들의 가혹한 수탈 행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1356년 기철 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분노했고,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어요.

1364년, 덕흥군을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내세우며 1만 명의 원나라 군사를 보내 고려를 침공하도록 했죠.

하지만 이들은 고려의 장수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 대패했습니다.

 

개인의 복수심이 한 나라의 안보를 위협한 것이죠.

 

하지만 그녀에게 긍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나라에 끌려간 공녀 제도를 폐지시켰고, 북경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는 죽을 배급하고 장례를 지원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녀 덕분에 고려의 문화가 원나라에 널리 퍼지면서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어요.

고려의 의복과 식문화가 원나라 황실과 고위층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죠.

 

개인의 권력 욕망과 제국 말기의 혼란이 교차하며 복잡한 결과들을 낳은 셈입니다.

역사적 의의와 우리의 질문

기황후의 삶은 궁녀에서 황후로 이어진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였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갈등과 사적인 욕망으로 인한 역사적 행보는 그녀에 대한 평가를 매우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녀의 권력욕은 원나라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황제 혜종이 국정을 등한시하자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옹립하고 섭정을 시도하며 황태자당과 황제당의 대립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권력 다툼은 원나라의 국력을 쇠퇴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죠.

 

『원사』에는 자정원 운영과 황후 측의 정무 개입 등 그녀의 권한 확대에 대한 경계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368년, 명나라 주원장의 군대가 원나라의 수도를 함락하자, 기황후는 북원(北元)으로 전락하여 응창부(應昌부)로 천도하는 혼란 속에서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그녀의 아들이 북원의 황제가 되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행적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요.

 

기황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의 야망'과 '구조적 한계' 중 어디에 더 큰 무게를 두어야 할까요?

그녀의 성공은 개인적 야망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원나라의 쇠퇴와 고려의 불안정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였을까요?

'고려양(高麗樣)'과 오늘날의 '한류'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질까요?

고려양이 황실과 귀족층 위주로 퍼졌다면, 오늘날 한류는 대중적이고 폭넓은 파급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죠?

 

기황후의 이야기는 흥망성쇠(興亡盛衰)의 파도 위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가고, 또 그 선택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보여줍니다.

사건 연표 (요약)

기황후 관련 주요 사건 연표
연도 사건
1335 타나실리 일족 몰락, 권력 균열
1338/1339 황자 아유르시리다르 출생
1340 제2황후 책봉
1353 자정원 및 군사 라인 영향력 확대
1356(고려) 공민왕의 친원파 숙청 (기씨 일족 타격)
1365 제1황후(정후) 승격
1368 대도 함락, 응창 천도 (북원)

한 줄 비교표

기황후 삶의 원인, 경과, 의의
원인 경과 의의
원 간섭, 권문세족, 파벌화 제2 → 제1황후 등극, 덕흥군 옹립 및 원군 파견(실패) 전례 파괴 및 문화 파급 vs 파벌 심화 및 대외 혼란
 

Q1. 다음 중 공민왕의 개혁 조치로 옳은 것은?

원 간섭기의 권문세족 경제 기반을 약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한 정책을 고르세요.

  • ① 과전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 ②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 ③ 서원의 난립을 억제하였다.
  • ④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출처: 한능검(심화) 공민왕 파트 기출·해설 요지
정답: ②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 권문세족의 불법 농장·노비 문제를 바로잡았습니다.

Q2. 원 간섭기 제도 변화로 옳은 것은?

원 간섭기 고려 중앙 관제의 변화를 고르세요.

  • ① 중추원과 삼사로 개편되었다.
  • ②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로 개편되었다.
  • ③ 비변사가 설치되어 군국기무를 전담했다.
  • ④ 도평의사사가 폐지되었다.
출처: 한능검 원간섭기 파트 기출·해설 요지
정답: ②
원 간섭기에 관제 명칭이 격하되고 중서문하성·상서성이 첨의부로 재편되었습니다.

Q3. 다음 자료의 시기 사회 모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발췌 요지: 공녀 선발 관련 기록과 원 간섭기의 사회상.

  • ① 서원과 사우가 문중 중심으로 건립되었다.
  • ②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활발했다.
  • ③ 지배층 사이에 변발과 몽골식 복장이 유행했다.
  • ④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출처: 한능검(고급) 원간섭기 사회·문화 파트 기출 유사형
정답: ③
원 간섭기에는 지배층 사이에 몽골풍(변발·복식)이 유행했고, 반대로 원 지배층에는 고려양이 퍼졌습니다.

Q4. (공무원) 다음 중 공민왕의 업적으로 옳지 않은 것은?

문맥: 원의 간섭 지속, 기씨 세력 전횡 심화 등 배경 서술 후 공민왕의 조치로서 타당하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 ① 요동 지역을 공략하여 고구려 옛 땅을 수복했다.
  • ②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 ③ 성균관을 정비하여 유교 교육을 강화했다.
  • ④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다.
출처: 국가직 7급 유형 유사 기출 정리
정답: ④
사림원 설치는 충선왕의 개혁으로, 공민왕 업적이 아닙니다.

Q5.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유교 교육을 강화한 왕은?

  • ① 성종
  • ② 예종
  • ③ 공민왕
  • ④ 공양왕
출처: 한능검 심화 공민왕 교육 제도 파트 기출
정답: ③ 공민왕
공민왕은 성균관을 정비하여 성리학 교육을 강화했습니다(국자감→성균관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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