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그 이전의 진실: 최영과 이성계의 갈등이 빚어낸 역사적 전환점
위화도 회군 그 이전의 진실: 최영과 이성계의 갈등이 빚어낸 역사적 전환점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사’ 블로거입니다.
오늘은 고려 말 역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꾼 ‘위화도 회군’의 배경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흔히 이성계의 전략적 판단으로 평가되는 이 사건은,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정치적 갈등과 두 영웅의 가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 고려의 마지막 충신 vs. 신흥 권력의 선두주자
최영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처럼 청렴하고 충절을 지킨 고려 무장이었습니다. 오직 왕실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지향하며, 무너져가는 고려 왕조를 다시 세우고자 했습니다.
반면 이성계는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친 전공으로 부상한 신흥 무장으로, 낡은 체제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국가 질서를 구상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충정을 품었으나,
- 최영은 기존 질서의 회복을,
- 이성계는 변화를 통한 재건을 추구했습니다.
그 차이는 결국 역사상 공존할 수 없는 ‘충돌의 씨앗’이 됩니다.

✦ 교과서 밖의 이야기: 회군의 진짜 목적은?
교과서에서는 위화도 회군을 “무리한 명나라 원정에 대한 이성계의 판단”으로 풀이하며, ‘4불가론(四不可論)’을 그 근거로 설명합니다.
- 여름철 원정의 무리함
- 장마철 역병의 위험
- 왜구 침입 가능성
- 명나라와의 외교 마찰
하지만 야사와 일부 사료는 이를 정치적 명분으로 포장된 쿠데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 회군 직후 이성계는
- 최영을 제거하고
-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며
- 신진사대부와 손잡아
빠르게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닌 정치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 갈등의 심화: 우왕 폐위와 ‘가짜 왕’ 논란
위화도 회군의 결정적 분기점은 우왕 폐위였습니다.
최영은 우왕을 지지하며 요동 정벌을 추진했지만, 이성계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출생 논란을 제기하며 정통성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는
- 최영 세력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정치적 타격이었고
- 훗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역사적 근거로 활용됩니다.
이성계는 창왕까지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함으로써 고려의 마지막 숨결마저 걷어냅니다.
✦ ‘만약에’를 상상해보자: 회군이 없었다면?
이성계가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정벌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국력 소모와 내부 혼란으로 고려가 더 빠르게 몰락했을 가능성
- 반대로 회군이 없었다면 조선이라는 국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력 투쟁과 전쟁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건 백성들이었다는 점입니다.
⬥ ‘동상이몽’의 정치, 오늘을 비추다
최영과 이성계는 결국 서로 다른 꿈을 꿨습니다.
- 최영은 충절과 전통을,
- 이성계는 변화와 기회를 좇았습니다.
이 관계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동상이몽(同床異夢)’ 정치 구조와 닮았습니다.
겉으로는 협력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다른 목적을 품고 있는 현실—역사는 오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 역사 속 현장을 걷다: 두 영웅의 흔적
- 최영 장군의 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이성계의 흔적: 경복궁, 종묘, 조선 왕조의 시초가 된 터전들
※ 위화도는 현재 북한 지역에 위치하여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역사 속 ‘회군’의 상징으로 이름만은 여전히 강한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맺음말: 충신인가, 혁신가인가
최영은 ‘마지막 고려인’으로서 끝까지 충절을 지킨 비극적 영웅입니다.
이성계는 ‘새 시대를 연 현실주의자’로서 조선을 창건한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회군이 과연 순수한 민심의 반영이었는지, 아니면 정권 장악을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는지는 여전히 역사적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무엇을 위한 권력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변화를 추구할 때, 정당성과 윤리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이 사건에서 되새길 수 있습니다.
📌 독자 참여 코너
여러분이 궁금한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이 있으신가요?
아래 댓글에 남겨주시면, 다음 포스팅에서 여러분의 궁금증을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사’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역사의 문을 엽니다.
(2022년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
"요동은 본디 고구려의 옛 영토이다. 지금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는 것은 부당하다. 이에 요동을 정벌하여 우리의 영토를 회복하고 대국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해설: 제시된 사료는 고려 말 우왕과 최영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며 요동 정벌을 추진한 배경이다. 이는 위화도 회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023년 제65회 한능검 심화)
고려 말,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에 맞서 (가)는 요동 정벌을 주장했으나, (나)는 이를 반대하며 4불가론을 내세웠다.
해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에 대해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은 최영이다. 반면 이성계는 요동 정벌의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다.
(2020년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군사를 돌리셨소? 왕명을 거역하고 사사로운 뜻을 펼치려는 것인가?" "대감, 지금 요동으로 가는 것은 여름철 역병과 장마로 인해 군사들의 희생만 초래할 뿐입니다. 이는 소신이 고려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해설: 제시된 대화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관련된 내용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 제거, 우왕·창왕 폐위, 신진사대부의 성장 등이 전개되었다.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 공민왕 때의 일로, 위화도 회군보다 이전 시기의 사건이다.
(2021년 수능 한국사)
연표는 공민왕의 개혁 정치 이후 조선 건국까지의 시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는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시기입니다.
해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전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의 주요 무장으로 함께 왜구를 격퇴하는 등 협력 관계에 있었다. 이는 위화도 회군 이전의 상황을 묻는 문제로, 당시 두 사람의 협력 관계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문항이다.
(2019년 제44회 한능검 심화)
최영이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군대를 보냈으나, 장마와 역병을 이유로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정권을 장악하였다.
해설: 제시된 내용은 위화도 회군에 대한 설명이다. 이 사건 이후 최영은 처형되고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며 과전법을 실시했다. 신돈의 전민변정도감 설치는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위화도 회군보다 앞선 시기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