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리의 정변: 고을불이 미천왕으로 즉위하다
❖ 창조리의 정변: 고을불이 미천왕으로 즉위하다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사' 블로그입니다.
여러분은 고구려 제15대 왕, 미천왕을 기억하시나요? 교과서에서는 낙랑군을 정복한 자주적인 군주로 간단히 언급되곤 하죠.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극적이고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오늘은 왕이 되기 전 고달픈 삶을 살았던 **'을불'**과, 그를 알아보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충신 **'창조리'**의 이야기를 통해 미천왕 즉위의 숨겨진 이면을 들여다보겠습니다.
✦ 폐위된 왕손, 떠돌이 을불의 삶
미천왕의 본명은 **을불(乙弗)**입니다. 그는 고구려 제13대 **서천왕(西川王)**의 손자이자, 제14대 **봉상왕(烽上王)**의 조카였지만, 왕족 간의 권력 투쟁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고돌고(高突固)**가 역모 혐의로 제거되면서, 을불은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지목되어 생명을 위협받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죠.
궁궐을 떠난 그는 백성들 틈에서 숨어 지내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소금 장수, 노비, 하급 일꾼 등으로 살아가며 왕족임을 숨기고 **'고을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감추었다는 야사도 전해집니다. 이러한 삶은 을불에게 고통이었지만, 훗날 민심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왕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떠돌이 신세의 을불 이미자
✦ 국상 창조리의 결단
당시 군주였던 봉상왕은 폭정과 사치로 민심을 잃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적은 물론 동생 달가까지 죽이는 잔혹한 행보는 신하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죠. 이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고구려의 국상(國相), 즉 최고 행정관직에 있었던 **창조리(倉助利)**였습니다.
창조리는 봉상왕의 치세로는 나라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통성과 민심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왕을 세우고자 결심합니다. 그는 생존한 왕족 중 을불이야말로 고난을 겪으며 백성의 삶을 체득한 진정한 지도자라 여겼습니다.
✦ 봉상왕 폐위와 미천왕의 즉위
봉상왕 8년(299년), 결국 창조리는 뜻을 함께한 대신들과 함께 봉상왕의 폐위를 단행합니다. 이는 고구려에서 보기 드문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었고, 사실상 정변이었지만 유혈 사태 없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이듬해인 서기 300년, 창조리는 민심을 얻고 있던 을불을 찾아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했습니다. 을불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창조리의 절절한 호소와 백성들의 지지에 마침내 결심하고 왕위에 올라 **제15대 미천왕(美川王)**이 됩니다.
✦ 야사로 전해지는 을불과 창조리의 만남
민간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을불은 한 부잣집의 노비로 일하며 소금을 나르던 중 주인의 함정에 빠질 뻔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누명을 피하고 소금을 숨긴 채 거래를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후일 창조리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는 을불의 지혜와 성품에 깊은 감명을 받아 직접 찾아가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고 하죠.
이 야사는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와 구전설화 속에서 그 윤곽을 찾을 수 있으며, 실제로는 상징적 의미가 강합니다. 민중은 고난을 이겨낸 을불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충신 창조리의 결단을 통해 시대가 바뀌길 바랐던 민심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 창조리의 정변이 남긴 교훈
이 사건은 단순한 권력 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진정한 리더의 탄생 미천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구려의 동쪽과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낙랑군을 정복하여 한사군의 잔재를 제거하며 고구려의 자주성을 확립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백성 중심의 정치로 이어졌습니다.
충신의 용기와 판단력 창조리는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인물입니다. 폭군을 몰아내고 백성을 위한 새 질서를 세우는 일에 앞장선 그의 결단은 오늘날까지도 '숨은 영웅'의 전형으로 회자됩니다.
시대를 읽는 눈, 국민을 위하는 마음 역사 속 변화는 언제나 그 시대의 흐름을 읽고, 국민의 뜻을 대변하려는 누군가의 결단에서 비롯됩니다. 창조리의 정변이야말로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 미천왕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
아쉽게도 미천왕의 능은 현재 북한 평양시 대성구역 일대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직접 방문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사와 관련된 전시나 박물관에서 간접적으로 그의 업적을 접할 수 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유물과 왕권 상징 전시
- 천안 독립기념관: 삼국시대 자주정신 관련 전시
- 다큐멘터리·사극 콘텐츠: 미천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를 통해 이해 증진 가능
마무리하며
고난 속에서 왕으로 다시 태어난 을불, 그리고 그를 발굴한 창조리의 지혜는 한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비록 교과서에서는 그 이름이 짧게 언급될지라도, 이들의 삶과 선택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줍니다. 역사 속 '숨은 공로자'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역사 공부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 FAQ 정리
Q1. 창조리의 정변은 언제 일어났나요? A. 서기 300년(봉상왕 9년),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입니다.
Q2. 미천왕은 즉위 전 어떤 일을 했나요? A. 정치적 박해를 피해 백성 속에 숨어 살며 소금장수, 노비 생활을 했습니다.
Q3. 창조리는 어떤 인물인가요? A. 고구려의 국상(국무총리급)으로, 봉상왕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정변을 주도한 충신입니다.
Q4. 미천왕의 주요 업적은 무엇인가요? A. 낙랑군을 축출하고 고구려의 국력을 회복·확장시킨 자주적 군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