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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고구려 부흥의 첫 시도 안승과 신라의 복잡한 셈법

by solutionadmin 2025. 8. 17.

고구려 부흥의 첫 시도 안승과 신라의 복잡한 셈법

고구려 부흥군 지도자 안승을 재현한 상상도 — 출처: 작성자 직접 제작(AI 생성) · 저작권 보유 © 2025

멸망의 비극, 그 후 꺼지지 않은 염원

천 년 넘게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들의 가슴 속에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뜨거운 염원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안승(安勝)은 그 염원을 실현하려 했던 첫 번째 인물로 기록됩니다. 과연 그는 누구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고구려 부흥의 깃발을 들었을까요?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부흥 운동을 넘어, 당시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복잡한 속내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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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모잠과 안승, 동지에서 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유민 통제를 위해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각지에서는 당의 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그 중심에는 고구려 장수 출신 검모잠(劍牟岑)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당군에 맞섰고, 점차 부흥 운동의 확고한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검모잠은 부흥 운동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왕족 출신을 지도자로 세울 필요를 느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보장왕의 외손자로 기록된 안승을 추대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검모잠은 안승을 왕으로 옹립해 유민들의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부흥 운동의 방향을 두고 두 사람의 의견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전략 차이 검모잠의 입장 안승의 입장
핵심 당나라와의 정면 대결은 어렵다. 백제 부흥군을 지원했던 왜(일본)와의 연대를 통한 부흥.
추진 방향 신라와의 동맹을 통한 당나라 견제. 신라를 불신하며 왜의 힘을 이용하려 함.
결과 안승에 의해 살해당함. 신라로 망명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

이 갈등은 결국 비극으로 치달았습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안승은 검모잠을 살해하고, 고구려 부흥군 일부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합니다. 이 과정은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쓸모없어지면 버린다는 의미의 ‘토사구팽(兎死狗烹)’에 자주 비유됩니다. 이는 안승의 행보에 대한 후세의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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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국 건국과 신라의 복잡한 정치 계산

안승을 받아들인 신라의 문무왕은 그에게 고구려 옛 땅이 아닌, 백제 옛 영토인 금마저(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이 나라가 바로 보덕국(報德國)입니다. 이름은 ‘덕을 갚는다’는 뜻으로, 신라의 지원에 대한 보답이자 사실상 신라의 속국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왜 고구려 부흥 운동의 세력을 지원했을까요? 이는 고구려 유민의 통제를 넘어, 당나라와의 복잡한 외교 관계 속에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 당나라 견제와 외교적 명분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보덕국을 지원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 유민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는 당나라가 고구려 부흥을 구실로 신라를 공격할 명분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신라는 마치 당나라의 군사적 위협을 보덕국이라는 방패로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 완충 지대 확보

신라는 보덕국을 당과 신라 사이의 완충 지대로 삼아, 당의 남하를 견제했습니다. 한반도 내부에서 고구려 부흥 세력이 당과 충돌할 가능성을 이용해 당의 군사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 삼국 유민의 통제

보덕국은 단순히 고구려 유민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보덕국을 백제 옛 땅에 세운 것은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이 여전히 활동하던 이 지역에 고구려 유민을 배치함으로써 두 유민 집단을 상호 견제하고, 나아가 점진적으로 신라 체제에 편입시키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덕국은 신라가 당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삼한 통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외교적, 군사적 자원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보덕국은 신라에게 단순한 동맹이 아닌, 전략적 도구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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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승의 선택, 그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인가?

보덕국의 왕으로 있었던 안승은 신라 왕실로부터 김씨 성을 하사받았고, 훗날 신라 최고위 관직 중 하나인 소판(蘇判)에 오르며 신라 귀족으로 편입됩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과연 고구려 부흥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안위를 위한 기회주의적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기회주의자론: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귀부한 점, 그리고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어 안락한 삶을 산 점에서 고구려 부흥보다는 개인 안위를 우선시했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선택은 고구려 유민들의 염원을 배신한 행위로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 현실론자론: 반면, 당나라의 압도적인 군사력 속에서 홀로 부흥을 꾀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신라의 힘을 빌려 부흥을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는 ‘대장부지소위(大丈夫之所爲)’, 즉 큰 뜻을 이룬 사람은 일시적인 불명예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 복합적인 인물론: 안승의 행적은 그의 결정이 단순한 선악으로 나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민족의 염원과 개인의 생존이라는 두 가지 무거운 짐을 모두 짊어져야 했던 복합적인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보덕국은 결국 신라의 속국화에 반발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흔들렸고, 신라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덕국을 해체합니다. 이후 안승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고, 반발하는 고구려 유민들은 전국 각지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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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유민의 저항과 발해의 서막

안승이 신라 체제에 협력하는 모습은 일부 고구려 유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보덕국의 해체와 안승의 귀부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강제 이주 정책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은 말갈족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동모산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발해(渤海)**입니다.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천명하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위용을 떨칩니다. 안승의 보덕국이 신라의 이해관계 속에서 좌초했지만, 고구려 부흥의 꿈은 결국 발해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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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시사점과 역사 현장

안승과 보덕국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 역사 속 인물의 복합성: 역사 속 인물은 단순한 영웅이나 배신자로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안승의 행보는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개인의 선택이 얽힌 결과물입니다.
  • 역사적 사건의 다면성: 보덕국 건국은 고구려 부흥 운동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신라, 당나라, 그리고 삼국 유민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 관계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 꺼지지 않는 민족의 염원: 안승의 보덕국은 실패로 끝났지만,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발해 건국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역사의 큰 흐름을 이끄는 것은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가 아닌, 민중의 꺼지지 않는 염원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전라북도 익산**입니다. 익산에는 보덕국이 있었던 **금마저(왕궁리 유적)**와 안승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안승총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과도 연결되어, 통일 전후 삼국의 복잡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고구려 부흥의 꿈과 삼국 통합의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현장에서, 여러분의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보세요.


💬 독자 참여 코너

Q. 여러분이 만약 안승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요?

1. 검모잠과 함께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한다.
2. 안승처럼 신라에 망명하여 보덕국을 세운다.
3. 다른 길을 모색하여 또 다른 부흥의 길을 찾는다.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눠주세요!

 

1. 다음 중 안승과 보덕국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① 경덕왕 때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여 서라벌 인근에 보덕국을 설치하였다.
  • ② 문무왕이 안승을 받아들여 백제 옛 영토인 금마저(익산)에 보덕국을 세우게 했고,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 ③ 보덕국은 사비(부여) 일대에서 백제 부흥군과 연합하여 당군을 격파한 국가였다.
  • ④ 보덕국은 당나라의 보호 아래 안동도호부에 소속된 자치국이었다.

정답: ②

해설: 문무왕은 안승을 환대하고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을 세우게 하였으며, 대외적으로 고구려 유민을 포섭했다는 명분을 위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습니다.

출처: 공무원 한국사·한능검 기출 개념 변형
2. 다음 사건을 발생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안승이 신라에서 보덕국을 건국함
(나) 평양성 함락으로 고구려 멸망
(다)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각지로 강제 이주시킴
(라)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함
  • ① (가) → (나) → (다) → (라)
  • ② (나) → (가) → (다) → (라)
  • ③ (나) → (다) → (가) → (라)
  • ④ (다) → (나) → (가) → (라)

정답: ②

해설: 고구려 멸망(668) → 보덕국 건국(문무왕 대, 익산 금마저) → 유민 강제 이주(통일전후 신라의 유민 통제 정책) → 발해 건국(698)의 순서입니다.

출처: 한능검 심화·수능 한국사 연표형 기출 변형
3. 신라가 보덕국을 금마저(익산)에 세우도록 한 목적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 ① 당나라의 남하를 견제할 완충 지대를 확보하려 했다.
  • ② 고구려 유민을 간접 통제하여 신라 체제에 편입시키려 했다.
  • ③ 백제 부흥 세력을 견제하고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 ④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집안)을 즉시 수복해 직접 지배하려 했다.

정답: ④

해설: 보덕국은 고구려 옛 땅이 아닌 백제 옛 영토에 설치되어 완충·통제·견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국내성의 즉각 수복은 보덕국 설치 목적과 거리가 멉니다.

출처: 공무원 한국사 정책 의도 파악형 기출 변형
4. 검모잠과 안승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옳은 것은?
  • ① 검모잠은 신라에 귀부하여 소판이 되었고, 안승은 왜의 지원으로 요동에 독립국을 세웠다.
  • ② 검모잠은 안승을 부흥 운동 지도자로 추대했으나, 안승은 주도권 다툼 끝에 검모잠을 제거하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 ③ 안승은 백제 부흥군과 연합해 사비에서 보덕국을 세웠고, 검모잠은 당나라로 망명했다.
  • ④ 두 사람은 끝까지 협력하여 당나라와의 전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답: ②

해설: 검모잠은 정통성 강화를 위해 안승을 추대한 뒤 신라와의 연계를 모색했으나, 안승은 다른 노선을 주장하며 주도권 갈등 끝에 검모잠을 제거하고 신라로 향했습니다.

출처: 한능검 심화 인물 관계 파악형 기출 변형
5. 보덕국의 전개와 안승의 말년을 연결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① 보덕국은 당나라의 보호국이 되었고, 안승은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 ② 보덕국은 신라에 편입되었고, 안승은 김씨 성을 하사받아 소판에 오르는 등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 ③ 보덕국은 고구려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독자 노선을 걸었다.
  • ④ 보덕국 해체 직후 안승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정답: ②

해설: 보덕국은 신라에 흡수되었고, 안승은 김씨 성을 받고 소판에 올라 신라 체제 속 인물로 생을 마쳤습니다.

출처: 수능 한국사·공무원 한국사 인과 관계형 기출 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