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칼끝은 안쪽을 향했다 – 남곤의 좌익 회군 미수 사건⬥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사’ 전문 블로거입니다. 오늘은 조선 중종 시대, 기묘사화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사건, 남곤의 좌익 회군 미수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당시 권력 다툼과 사림의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마치 역사 선생님이 들려주듯, 그 진실을 하나씩 풀어가 보겠습니다.
✦남곤과 기묘사화 이후, 왜 칼을 빼려 했는가? ⚔✦
1519년, 조광조를 필두로 한 신진 사림 세력이 훈구파의 공격으로 숙청당한 기묘사화는 조선 정치사의 중대 전환점이었습니다. 당시 남곤과 심정은 이 사화의 주도 세력이었고, 사건 이후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늘 불안정한 법이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사자성어처럼, 조광조 제거 이후 이들의 칼끝은 이제 내부를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곤은 중종의 총애를 받던 신흥 외척 김안로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됩니다. 일부 야사에 따르면, 남곤은 조광조 숙청 직후 “다음은 김안로”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이는 단순한 정적 제거 이상의 정치적 신호로 해석됩니다.

❖좌익 회군 미수 사건, 그 실체와 역사적 의문점❖
'좌익 회군'이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이 사건 자체도 공식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 야사와 사설에는 남곤과 심정이 일부 무신 세력과 결탁하여 궁궐로 군사를 동원하려 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좌익(左翼)’은 조선 시대 군영의 일부분으로, 남곤이 좌익군을 이용해 쿠데타성 행동을 계획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며 다음과 같은 해석이 공존합니다.
- 모함설: 김안로 세력이 남곤을 견제하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
- 압박용 계획: 심리전 차원에서 군 동원을 언급했으나 실행하지 않았다는 설
- 실질적 시도: 제한적인 군 동원 시도는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왜 이 사건이 중요한가 – 사림의 분열과 외척 정치의 출발점✦
- 사림의 내분과 훈구의 분열: 조광조 제거 이후 사림 세력은 와해되고 훈구파 내부에서도 권력 다툼이 발생. 남곤과 심정의 갈등은 그 상징적 사례.
- 외척 정치의 부상: 남곤 세력 붕괴 이후 김안로가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 이는 훗날 을사사화의 배경이 됨.
- 정사와 야사의 간극: 실록에 없는 사건이지만 야사에는 등장.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 다양한 기록의 필요성을 시사.
❖남곤과 조광조 – 교류했던 두 인물의 엇갈린 길❖
많은 사람들은 남곤을 훈구파로만 기억하지만, 초기에 그는 조광조와 교류하며 사림적 성향을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벽 앞에서 그는 점차 노선을 바꾸게 되었고, 조광조 숙청 후에도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좌익 회군 미수 사건은 그런 남곤의 절박한 정치적 선택이었으며, 이상과 현실이 어떻게 갈라졌는지를 상징합니다.
✦관련 유적과 교과서 밖 이야기✦
- 심곡서원 (경기도 용인시):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의 정신을 기리는 서원.
- 밀성군 묘역 및 신도비 (경기도 하남시): 남곤이 생전에 지은 비문을 통해 정치적 입장을 엿볼 수 있음.
⬥오늘날의 교훈 – 기록되지 않은 권력투쟁에서 배운다⬥
남곤의 사건은 단순한 실패 사례가 아닙니다. 기록되지 않았기에 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할 사건이며, 사료의 한계를 넘어 역사를 해석하는 비판적 시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견제 없는 권력의 위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그리고 사림 정치의 좌절을 모두 담고 있는 이 사건은 지금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 줍니다.
📜 독자 참여 코너 📜
여러분은 남곤의 '좌익 회군'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 생각하시나요?
혹은 김안로 세력의 조작이었을까요?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던 권력투쟁의 또 다른 모습일까요?
댓글로 자유롭게 의견을 남겨 주세요!
1.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7회)
다음 정책을 추진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현량과를 통해 신진 인재를 등용하였다.
- 소격서를 폐지하고 도학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 훈구파의 지지를 받아 위훈 삭제를 단행하였다.
- 중종의 지지를 받아 개혁 정치를 시도하였다.
- 이황과 더불어 성학십도를 저술하였다.
- 붕당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2. (국가직 9급 공무원 2022년)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 김종직의 문인으로 사림의 대표 인물이었다.
- 위훈 삭제와 현량과 실시를 주장하였다.
- 훈구 세력의 반발로 인해 결국 사화의 희생자가 되었다.
- 이이
- 조식
- 조광조
- 이황
3.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1회)
기묘사화 이후의 정치 상황으로 옳은 것은?
- 사림이 정국공신으로 대거 등용되었다.
- 훈구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 중종이 사림 세력과 손잡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 세종이 훈구파와 외척의 연합 정치를 시작하였다.
4. (지방직 9급 공무원 2021년)
다음 인물 중 김안로와 정치적 갈등을 겪은 인물로, 좌익 회군 미수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 이언적
- 이산해
- 남곤
- 이이
5. (수능 한국사 2020학년도)
다음 중 사림 세력이 훈구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집권 초기 시도한 개혁정치의 결과로 옳은 것은?
- 사화 발생으로 사림이 대거 숙청되었다.
- 공신 책봉을 통해 사림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 홍문관을 폐지하고 의금부를 강화하였다.
-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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