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 안용복, 일본 막부에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받다
❖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17세기 후반의 긴장
17세기 후반, 조선 숙종 시대의 동해는 조용하지만 끊임없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공도 정책(空島政策)을 펼치고 있었기에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는 사실상 비어 있는 땅이었죠. 이 틈을 타 일본 어부들이 끊임없이 몰래 들어와 불법으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땅이지만 관리가 소홀한 사이, 일본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며 영토 주권이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부산 동래의 어부였던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 어부들의 무단 조업을 직접 목격하고 격분했습니다. 그는 바닷길이 험난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불의를 보고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개인의 감정을 넘어, 나라의 영토가 침해당하는 것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 첫 번째 일본행: 우연한 납치에서 시작된 위대한 외교
1693년 4월, 안용복은 동료 박어둔과 함께 울릉도 인근에서 일본 어부들과 크게 마찰을 빚었습니다. 일본 어부들은 오히려 안용복 일행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땅인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안용복의 첫 번째 일본행이었습니다.
✦ 위기를 기회로, 당당히 조선의 영토를 주장하다
일본으로 끌려간 안용복은 오키섬과 돗토리 번을 거쳐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인 에도 막부까지 이송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위축되거나 두려움에 떨었을 상황이지만, 안용복은 달랐습니다. 그는 낮은 어부 신분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당찬 태도와 논리적인 주장에 놀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문제에 대해 조선에 정식으로 외교적 확인을 요청하게 됩니다.
결국 막부는 이 문제를 조사한 뒤, 울릉도(죽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하는 ‘죽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죽도’는 울릉도를, ‘송도’는 독도를 의미했으므로, 이 금지령은 사실상 두 섬 모두 일본 어민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용복은 우연한 납치 덕분에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확약받고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 두 번째 일본행: 대담한 사칭 속에 숨겨진 전략적 선택
3년 뒤인 1696년, 안용복은 다시 울릉도에 갔다가 여전히 불법 조업 중인 일본 어부들을 발견합니다. 이미 막부의 금지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는 모습에 그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번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 관직 사칭, 무모함인가 전략인가?
두 번째 일본행에서 안용복은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道監稅官)’이라 자칭하며 일본 관리들에게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이 대담한 사칭은 조선의 공식 기록에는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야사로만 전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에 ‘조선 관백을 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행동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의 사칭은 무모해 보일 수 있으나, 당시 일반 어부의 신분으로는 일본 관리와 공식적인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그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선택을 했던 것이죠. 그는 이 두 번째 방문에서 일본 어민들의 불법 조업 중단 약속을 다시 한번 받아내고 돌아왔습니다.
❖ 귀국 후의 시련과 엇갈린 평가
그러나 귀국한 안용복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영웅의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출국하고, 관직을 사칭했다는 이유로 2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엄격한 외교 절차를 어긴 그의 행동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일본 측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재확인하는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후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을 “영웅호걸”로 평가하며, 그의 행동은 비록 공식 절차를 따르지 않았지만 국가의 영토를 지킨 위대한 행위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는 ‘공과(功過)’라는 말처럼, 공적과 허물이 함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안용복의 행동이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절차적 허물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죠.
❖ 역사적 의의와 오늘날의 가치
안용복 사건은 단순한 어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명백히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9년 5월 17일자 기록에는 “송도(독도)는 즉 자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의 땅이다”라는 내용이 남아 있어, 독도가 역사적으로도 조선 영토였음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본은 끊임없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용복의 이야기는 이러한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역사적, 외교적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영토 수호의 의지를 되새기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는 단순히 물고기를 잡던 어부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민간 외교관이자 국토 수호의 상징이었습니다.
❖ 안용복의 발자취를 기리다
장소 | 위치 | 특징 |
---|---|---|
부산 수영사적공원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 ‘강역을 지킨 사당’이라는 뜻의 ‘수강사(守疆祠)’와 안용복 동상이 있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
울릉도 안용복기념관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안용복길 24 | 안용복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
❖ 독자 참여 코너: 안용복에게 한마디!
안용복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당신이 17세기로 돌아가 안용복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그의 용기에 감사하는 말, 혹은 그가 옥살이를 해야 했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등 자유롭게 댓글로 남겨주세요!
❖ 마무리: 한 어부의 용기, 영토를 지키다
안용복은 단순한 어부를 넘어선 민간 외교관이자 국토 수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용기와 집념은 국가가 지켜야 할 영토와 주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며, 오늘날까지도 독도 수호 정신의 밑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부산과 울릉도의 기념관을 직접 찾아가 본다면, 역사 속 그가 지녔던 결연한 의지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숙종 시기, 어부 신분이었던 (가)는 울릉도와 독도에 불법 조업을 하던 일본 어부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고, 결국 에도 막부로부터 일본인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하는 내용의 서계를 받아냈다.
안용복은 두 차례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일본 막부로부터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나머지 보기는 다른 시대나 다른 인물에 대한 설명이다.
안용복이 일본에 끌려가게 되자, 그는 돗토리 번주 앞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 막부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안용복 사건이 발생했던 숙종 시기, 조선은 섬에 왜인의 불법 조업을 막고 관리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도 정책'을 시행하여 섬을 비워두었다. 이는 안용복이 개인적으로 일본에 건너가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왜가 우리의 땅을 침범한 것을 깨닫고, 왜인의 입도를 금지하였다.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도(于山島)라 불리는데, 이 두 섬은 바로 동해에 있는 우리의 땅이다."
제시된 자료는 안용복 사건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안용복이 활약한 시기는 숙종 때이다. 숙종 시기에는 백두산정계비(1712)가 세워져 청과 국경을 확정했다. 나머지 보기는 다른 시기의 사실이다.
"죽도(울릉도)는 원래 일본의 영토가 아니므로, 일본 어부들의 출입을 금지한다."
안용복이 일본 막부로부터 받아온 '죽도 도해 금지령'은 일본이 울릉도에 대한 조선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안용복은 두 차례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귀국 후 무단 출국과 관직 사칭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후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영웅호걸이라고 칭찬하며, 한 어부의 용기가 나라의 영토를 지킨 위대한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안용복은 무단 출국 등의 죄목으로 조선 정부로부터 오히려 옥살이와 귀양을 가는 등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포상을 받았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조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과학의 황금기를 열다, 장영실과 세종대왕: 신분 차별을 넘어선 기술 혁신 이야기 (3) | 2025.08.16 |
---|---|
장희빈의 몰락, 왕권 강화와 정치 스캔들이 낳은 파국 (3) | 2025.08.16 |
조선과 일본을 잇는 문화의 다리, 조선 통신사의 숨은 이야기 (5) | 2025.08.14 |
왕위를 향한 검은 그림자, 계유정난의 서막 (4) | 2025.08.14 |
정도전, 재상 중심 정치를 설계하다 — 왕권과 신권의 이상적 조화 (4) | 2025.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