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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왕의 아들이지만 ‘얼자’ 취급받다: 영조의 평생 콤플렉스와 조선 왕실의 숨겨진 신분 계급

by solutionadmin 2025.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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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잠긴 조선의 왕 뒤로, 낮은 신분의 어머니와 양반의 모습 / 출처: 작성자 직접 제작(AI 생성), 저작권 보유 © 2025

 

무수리의 아들로 불린 영조와 궁녀 소생 옹주의 혼인 사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신분 차별과 오늘날 학벌·직장·집안이 만든 보이지 않는 잣대를 돌아보는 글입니다.

왕의 아들이지만 ‘얼자’ 취급받다: 영조의 평생 콤플렉스와 조선 왕실의 숨겨진 신분 계급

앞선 글에서 역사극에 자주 나오는 얼녀, 즉 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딸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려 보겠습니다. 왕이나 왕족이 평민 첩, 혹은 궁녀·노비 출신 여인에게서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어떻게 불리고, 또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피는 분명 왕족인데 어머니의 신분이 낮을 때, 조선 사람들은 그 아이를 어디쯤에 놓았을까요.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의식해야 했던 영조의 상처, 왕의 딸인데도 격이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혼인을 거절당한 태종 때의 사건을 통해 왕실 내부의 신분 차별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2. 얼자·서자, 서얼… 왕실에도 통했을까

조선 사회에서 서자와 얼자는 원래 양반가에서 쓰던 말입니다.

첩이 양인 신분이면 서자, 첩이 천인 신분이면 얼자라 불렀고, 둘을 합쳐 서얼이라고 했습니다.

서얼은 법적으로는 양반이었지만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에서 심각한 제약을 받았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벼슬길에 서기 어려웠던 것이 서얼이 안고 가야 했던 한계였습니다.

왕실이라고 해서 이런 감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왕실 안에서는 얼군, 얼옹주 같은 노골적인 표현을 공식 호칭으로 쓰지는 않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작호는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왕비 소생 아들은 대군, 후궁 소생 아들은 군, 왕비 소생 딸은 공주, 후궁 소생 딸은 옹주였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름표만 보면 왕비 소생과 후궁 소생의 차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아이를 평가할 때는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끝까지 따라다녔습니다.

양반가의 얼자·얼녀가 집안의 혼인과 상속에서 차별을 받았듯이, 왕족에게도 비슷한 시선이 작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칭은 왕자와 옹주였지만 실제 대우는 그렇지 않았던 경우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3. 왕의 아들이지만 평생 남은 상처: 영조와 숙빈 최씨의 출신 문제

왕족과 미천한 어머니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조선 제21대 왕 영조입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어려서 궁에 들어와 잡일을 하던 하급 궁녀로 출발해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품계를 올려 정1품 숙빈에까지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29년 6월 25일자 기사에는 숙빈 최씨에게 시호 화경을 내리고, 묘를 궁, 무덤을 원으로 격상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가 어머니의 위상을 얼마나 끌어올리려 했는지 실록만 봐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편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통념은 실록에 직접적으로 적힌 내용이라기보다, 신도비명과 후대 연구, 대중적 해석이 더해지면서 굳어진 이미지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궁녀 계층에서 출발해 비교적 미천한 신분으로 입궁했고, 후궁이 된 뒤에야 지위가 크게 올라갔다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영조는 어려서부터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말을 은근히 들으며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식으로 왕자에 책봉되고 나중에는 임금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는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가 보인 몇 가지 행적을 살펴보면 그 흔적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첫째, 어머니 숙빈 최씨에게 각별한 제사를 지내고 사우를 세우는 등 예우를 적극적으로 격상했습니다.

둘째, 신분이 낮은 쪽이나 서얼·하층민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서얼 허통 논의가 영조 대에도 이어지고, 정조 대에 가서 더 큰 진전을 보이는 흐름을 떠올리면 이 연속선 속에서 영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상처가 곧바로 정책의 직접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평생 자신의 출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면 영조가 후궁과 서얼 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피는 분명 왕족이지만,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스스로를 얼자에 가까운 존재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왕실 내부의 서열 구조가 영조 개인의 심리와 정치 운영 방식에 깊게 스며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4. 궁녀 소생 옹주라는 이유로 혼인에서 밀려난 딸: 태종과 이속 사건

이번에는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왕이 베푸는 혼인을 격이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거절한 쪽 이야기입니다. 바로 태종 때의 이속 사건입니다.

태종에게는 후궁 신빈 신씨 소생으로 각별히 아끼던 옹주가 있었습니다.

태종은 명문가 출신 관리 이속의 아들을 사윗감, 즉 부마 후보로 점찍고 혼인을 추진합니다. 왕의 딸과 혼인해 부마가 되는 일은 웬만한 집안에게는 큰 영광으로 여겨지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속이 뒤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합니다. 궁녀 출신 후궁의 딸, 곧 이 옹주와 혼인하는 것은 자기 집안의 체통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왕의 딸인 것은 맞지만, 어머니가 궁인 출신이니 우리 집안에서는 받기 어렵다.

이 말이 태종의 귀에 그대로 들어갔고, 태종은 크게 노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기록을 보면, 이속이 왕실을 업신여긴 죄와 혼사를 속인 죄로 장 100대를 맞고 서인으로 강등된 뒤 먼 지방으로 부처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왕의 딸을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은 곧 왕권 자체를 건드리는 일이라 본 것입니다.

형식만 보면 그 옹주는 분명 왕의 딸입니다. 작호도 옹주이며, 왕실 족보에도 이름이 올라갑니다.

그러나 혼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결국 어머니가 양반가 규수인지, 아니면 궁녀·노비 출신인지가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양반가에서 얼녀를 혼인 상대로 꺼리던 정서가 왕실에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던 셈입니다.

다만 왕권의 체면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태종은 이속의 말을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속마음에서는 이미 옹주와 그 어머니를 향한 보이지 않는 눈금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5. 이름은 옹주인데,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얼녀였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왕실 내부의 모습이 조금 또렷해집니다.

공식 호칭과 법제의 세계에서는 왕비 소생이냐, 후궁 소생이냐만 구분했습니다. 얼자·얼녀라는 표현을 공개적으로 쓰지는 않았고, 모두 분명한 왕족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과 혼인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후궁이 양반가 규수 출신인지, 아니면 궁녀·노비 출신인지가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습니다.

영조처럼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시선을 평생 의식해야 했던 왕, 이속 사건에서 보듯 궁녀 소생 옹주라서 격이 맞지 않는다며 뒤에서 말을 돌리던 혼사 자리.

이런 사례들을 이어서 보면, 왕실에도 분명 얼자·얼녀에 가까운 존재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공적으로 입 밖에 내는 순간 군주가 직접 나서서 강하게 다스렸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6.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얼자 기준은 무엇일까

조선 시대를 돌아보면 겉으로는 피 한 줄로 사람을 나눈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에 더해 어머니의 신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여론이 한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작동했습니다.

한동안 권력층이나 대기업 사이에서 집안과 이해관계를 잇는 결혼이 회자되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어떤 집안·어떤 배경인지부터 따지는 시선은 시대와 형태만 바뀌어 이어져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어느 대학 출신인지,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를 조선 시대의 어머니 신분처럼 따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겉으로는 평등을 말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사람을 다시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왕족의 핏줄은 분명 모두 왕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을 가른 것은 결국 가문과 배경,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얼자의 비극을 반복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핏줄은 무엇일까요. 학벌, 직장, 집안, 재산 같은 요소들이 오늘날의 새로운 얼자 기준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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