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으로 시작하는 역사
“발해를 세운 사람, 누구라고 알고 계세요?”
대부분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대조영!
맞습니다. 발해의 시조는 대조영이죠.
하지만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 또 한 명의 주역이 있습니다.
바로 **속말말갈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입니다. 그는 왕이 되지도 않았고, 이름조차 희미하게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발해라는 나라의 불씨가 되었죠.
여러분, 왜 걸사비우는 역사에서 잊혔을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를 다시 불러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시대 상황은 각자도생이 아닌 연대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합니다.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 세력이 당나라의 감시 아래 **영주(營州)**로 이주되지요. 영주에서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강제 노동, 끊임없는 징발, 군사적 감시.
마치 오늘날 악덕 거대 기업의의 규제 아래 억눌린 하청업체 같았습니다.
이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각자도생'이 아니라 연대였습니다.
걸사비우는 단순히 생존을 넘어, 자립을 꿈꿨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걸걸중상(乞乞仲象, 대중상 동일인설 有)**과 손을 잡았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풍습, 오랜 반목의 역사를 가진 두 세력이었지만,
걸사비우는 그 모든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영주 곳곳에서 쌓여 온 불만과 공포가 작은 불씨가 되어 퍼져 갔습니다.
드라마 같은 탈출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안개 자욱한 새벽, 영주의 야영지. 젖은 흙냄새, 군마의 콧김, 흔들리는 횃불.
걸사비우가 짧게 말합니다. "오늘 밤, 동쪽으로."
단 세 마디. 하지만 그 안에는 '노약자 우선 통과, 분산 이동, 추격 시 매복' 같은 치밀한 작전 원칙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 696년 거란 이진충의 대규모 봉기가 터져 영주는 혼란에 빠집니다.
걸사비우, 걸걸중상, 그리고 대조영은 이 틈을 “기회의 창”으로 읽고 탈출을 감행합니다.
당은 회유책을 펼쳤습니다.
걸걸중상에게는 진국공,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이라는 봉작을 내렸습니다.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그들은 공동체의 자유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추격은 집요했습니다. 협곡 입구, 전투가 벌어집니다. 부하들이 다 통과할 때까지, 걸사비우가 마지막에 남았습니다.
그는 창을 들고 외칩니다. “여기서 끊는다.” 화살이 빗발치고, 적이 밀려왔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동쪽으로 향하는 무리들을 향했습니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단순한 도망이 아닌, 새로운 나라의 꿈이었습니다.
후대의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정사에는 걸사비우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후대 연구자들은 그가 추격전을 막으며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합니다.
그의 희생 덕분에 공동체는 살아남았고, 지휘는 대조영에게 모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698년 천문령에서 추격군을 꺾는 대승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안전한 봉작을 받아들였을까요,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선택했을까요?
사료와 기록 ― 정사의 흔적
걸사비우의 이야기는 사료에 짧게 스쳐 지나갑니다.
- 「신당서」: 동북 변경의 혼란 속에서 고구려계·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새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멸망 뒤에도 유민들의 기개가 꺼지지 않았음을 전함.
사료는 단출합니다. 하지만 그 짧은 기록 속에서 걸사비우의 이름은 번쩍 빛납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
교과서는 “대조영의 승리”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대조영을 세운 이는 누구인가? 바로 걸사비우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CEO 옆에서 위기 순간 조직을 떠받치는 창업 1세대 운영책임자(COO) 같은 존재였지요.
그리고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영주 탈출의 그날 밤 걸사비우가 노약자를 먼저 통과시키기 위해 말의 안장을 풀어 수레에 묶어 주었다고 합니다.
공식 사료는 아니지만, 이 일화는 그의 치밀한 전략가적 면모와 인간적인 배려심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의미 ― 우리에게 남은 질문
걸사비우 서사의 핵심은 연대의 설계 → 실행 → 희생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회유가 달콤했지만, 그는 안전 대신 공동체의 자유를 택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비슷한 선택이 있습니다. 대기업 임원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스타트업 신입처럼 불확실하지만 자율의 길을 갈 것인가?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걸사비우는 동료들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이 한 나라의 미래를 바꿨습니다.
사자성어로 정리해 봅시다. 수어지교(水魚之交) ― 물과 물고기처럼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발해의 불씨를 지핀 힘은 화려한 무용담이 아니라, 서로를 의지한 관계였습니다.
독자 참여 코너 🙋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나눠 주세요!
- 걸사비우의 선택 중 오늘날 조직에서도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① 연대 설계 ② 현장 결단 ③ 후위 희생 (택 1 + 이유)
- ‘회유 vs 자립’의 기로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요?
- 역사 속 잊힌 영웅들, 걸사비우 외에 우리가 더 조명해야 할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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