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용의 군주로 기억되는 왕건은 왜 훈요십조 8조에서 남부 지역 인물을 경계했을까. 통일 뒤에도 남은 불신과 권력 재편의 의미를 따라가 본다.
요즘 재방송되고 있는 역사드라마 왕건을 보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견훤까지 품은 왕건이 왜 훈요십조에서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의 인물을 가까이 쓰지 말라”고 했을까요.
앞선 글에서는 왕건의 포용정치 뒤에 남아 있던 경계의 시선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질문의 중심에 있는 훈요십조 8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1. 훈요십조는 무엇이었을까
훈요십조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긴 정치적 유훈으로 전해집니다.
불교 정책, 수도 개경의 의미, 왕실 운영, 지방 세력 관리처럼 새 왕조의 질서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창업 군주가 남긴 정치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훈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해석을 낳은 조항이 바로 훈요십조 8조입니다.
2. 문제의 8조, 왜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올까
훈요십조 8조에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사람을 가까이 쓰지 말라는 취지의 말이 담겨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고려 초기 정치의 긴장을 그대로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차현은 일반적으로 차령 일대의 고개, 공주강은 공주를 흐르는 금강 구간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다만 청주 일대나 다른 특정 고개와 하천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어 정확한 지리 범위에는 여러 견해가 공존합니다.
대체로 이 표현은 금강 이남의 옛 후백제 권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통일을 이룬 왕건은 왜 이런 경계의 말을 남겼을까요.
3. 왜 이런 조항이 나왔을까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후백제 기반 지역 세력에 대한 정치적 경계입니다.
후삼국 시대 남부 지역은 오랫동안 후백제의 정치적 기반이었습니다.
견훤이 세력을 키우고 왕국을 세운 중심도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정치적 기억과 인맥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통일 이후에도 후백제 기반 세력의 재결집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훈요십조 8조는 단순한 지역 차별이라기보다 통일 직후의 정치적 불안과 경계가 담긴 문장으로 읽힙니다.
4. 하지만 해석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이 조항의 의미를 둘러싼 해석은 하나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는 후백제 기반 지역 세력에 대한 정치적 경계로 읽혀 왔지만, 풍수지리적 금기와 관련된 조항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한 위작설도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훈요십조는 한동안 전하지 않다가 현종 대에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이를 찾아 올렸다고 전합니다.
이런 전승 경위 때문에 문서의 형성과 전승 과정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1918년 일본 학자 이마니시 류가 제8조 조작설을 제기하면서 이 논쟁은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이 문제는 완전히 정리된 결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논쟁 자체가 고려 초기 정치 구조가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5. 남부 출신 인물을 모두 배척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훈요십조 8조는 정말 남부 지역 인물을 모두 배척하라는 의미였을까요.
실제 사례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태조는 영암 출신 최지몽, 승주 출신 박영규, 홍성 출신 홍규와 같은 남부 출신 인물들을 여러 차례 등용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훈요십조 8조를 곧바로 호남·충청 인물 전면 배제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조항을 특정 지역 전체에 대한 차별이라기보다 통일 직후 특정 세력의 급부상과 권력 집중을 경계한 상징적 경고로 보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6. 포용의 군주 왕건과 왜 모순처럼 보일까
여기서 다시 왕건의 통일 정치를 떠올리게 됩니다.
왕건은 분명 포용의 군주였습니다.
경순왕을 받아들이고, 평생의 적이었던 견훤까지 예우했습니다.
적을 제거하기보다 새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새 왕조의 창업자이기도 했습니다.
포용했지만 모든 세력을 완전히 신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품되 관리했고, 받아들이되 경계를 남겼습니다.
왕건의 포용정치는 단순한 미덕이라기보다 통합과 권력 안정의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7. 통일 뒤에는 공간 질서도 다시 짜였다
후삼국 통일 이후 변화한 것은 영토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의 중심도 달라졌습니다.
개경이 새로운 정치 중심이 되었고, 경주와 전주 같은 옛 거점의 의미도 달라졌습니다.
신라 왕실은 고려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고, 후백제의 기반 지역 역시 새로운 정치 질서 속에서 관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훈요십조 8조는 단순한 인사 규정이라기보다 개경 중심 체제가 남부 권역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 주는 문장으로도 읽힙니다.
8. 훈요십조 8조가 지금도 흥미로운 이유
훈요십조 8조가 오래도록 읽히는 이유는 이 짧은 문장 안에 통일 이후의 정치 현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왕건은 적까지 품은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 나라를 지켜야 하는 창업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통일은 단순한 화해의 서사가 아니었습니다.
포용과 경계가 함께 움직인 정치였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도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너그러운 군주로 기억되는 왕건 역시 통일 이후의 권력 균형을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요십조 8조는 지금도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통합이란 과연 어디까지가 포용이고 어디서부터가 경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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