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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의 개경 환도와 반원자주 정책, 몽골 간섭기에 빛난 고려의 저항

몽골 간섭기에 빛난 고려의 저항과 그 의미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사’ 블로그지기입니다.

오늘은 13세기,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원종(元宗)과, 그의 결단에 맞서 자주성을 외쳤던 삼별초의 항쟁 이야기를 쉽고 깊이 있게 들려드리려 합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개경 환도라는 역사적 사건이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라, 고려의 운명을 가른 드라마틱한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실 거예요.

✦ 왜 '원종의 개경 환도'가 중요한가?

고려 23대 왕 원종(재위 1260~1274)은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몽골 침공의 시대에 즉위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몽골군의 잦은 침입을 피해 1232년부터 무려 39년 동안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임시정권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최우를 비롯한 무신정권이 주도한 결정으로, 강화도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육지의 몽골 기병을 막고자 한 현실적인 대응이었죠.

 

그러나 오랜 피난과 전쟁은 백성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안겼고, 나라는 내부적으로도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결국 1259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게 되면서, 강화도 임시정부의 명분도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원종은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강화도의 저항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몽골과의 화평을 선택하고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길 것인가?"

 

이 선택이 바로 개경 환도(1270년)입니다.
원종의 결정은 곧 몽골 간섭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고려 왕실이 명맥을 잇고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는 현실적 방안이기도 했습니다.

❖ 개경 환도의 배경과 쟁점

⬥ 강화도 39년, 임시수도의 빛과 그림자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몽골군의 해상력은 약했기에 강화도는 장기간 버틸 수 있었지만, 그 안에서만 평온했던 최씨 무신정권과 달리,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끝없는 약탈과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 임시 피난은 결국 현실적 한계에 봉착합니다. 오랜 전란으로 국력은 약화되고, 무신정권의 독점적 지배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 원종의 결단과 외교적 선택
원종은 즉위 이후 여러 차례 몽골 사신을 접견하고, 쿠빌라이 칸과의 외교를 통해 상황 반전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고려에 요구된 조건은 '개경 환도''몽골의 내정 간섭 수용'이었습니다.
1270년, 원종은 백성과 왕실의 안위를 우선시해 개경 환도를 단행합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라, 몽골의 보호 아래 고려 왕실의 존속을 꾀하는 친원 정책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삼별초의 봉기와 항쟁에 대한 요약 설명자료 미미지


하지만 이 결정은 곧 내부 반발로 이어집니다. 오랜 저항의 상징이었던 무신정권과, 몽골에 끝까지 항거하던 군사 집단 삼별초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고려 사회는 다시 격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듭니다.

✦ 몽골 간섭기에 빛난 고려의 저항: 삼별초 항쟁

개경 환도와 함께 시작된 몽골 간섭기(1270~1356)는 고려가 몽골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놓인 시기입니다.
이때, 강하게 저항했던 집단이 바로 삼별초입니다.

 

⬥ 삼별초의 봉기와 항쟁
삼별초는 원래 무신정권의 사병이었으나, 몽골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변모합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배중손·김통정 등 지도부가 강화도에서 봉기, 진도(1271)제주도(1273)로 이동해 끈질기게 항전했습니다.
이 항쟁은 단순한 군사 반란이 아니라, 몽골 간섭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고려 민중의 자존심과 대몽 항쟁의 마지막 불꽃으로 평가받습니다.
비록 1273년 진압되었으나, 삼별초의 정신은 오랫동안 고려인의 자주정신으로 기억됩니다.

 

⬥ 교훈과 의의
삼별초의 저항은 현실적으로는 패배로 끝났지만, 그들의 '자주'와 '항거' 정신은 후대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바로 고진감래(苦盡甘來), 즉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사자성어처럼, 이 고통스러운 시기를

견딘 후 고려는 언젠가 자주성을 회복할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의 시사점 및 유적지 안내

⬥ 자주정신과 현실감각의 균형
자주정신: 외세의 압력 속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삼별초의 항쟁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현실감각: 무조건적인 저항만이 능사가 아님을, 원종의 결단이 일깨워줍니다. 백성의 생명과 국익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판단 역시 국가 지도자의 중요한 책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내부 갈등의 위험성
원종의 개경 환도와 삼별초 항쟁은 외부 위기 상황에서 내부 분열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는지 경고합니다.
위기 극복을 위해선 국민적 단결과 합리적 타협이 필수적입니다.

 

⬥ 유적지 탐방
강화도 역사관: 몽골 침입·임시수도 생활, 삼별초 항쟁 등 고려 말기의 역사를 복원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지로, 복원된 토성(제주 항파두리 유적)에서 고려 민중의 저항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 독자 참여 코너

원종의 개경 환도삼별초 항쟁, 여러분은 어느 쪽의 입장에 더 공감하시나요?

원종의 입장: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몽골의 압력을 일부 받아들이며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결단.

삼별초의 입장: 굴욕을 무릅쓰더라도 고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 투쟁.

여러분만의 생각을 댓글로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정답은 없습니다.

 

역사적 상황과 인물의 고민을 함께 이해하며, 더 깊은 통찰을 나누는 장이 되길 기대합니다.
다음에도 알차고 흥미로운 한국사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Q1. [공무원 9급 / 국가직] 다음 중 고려 원종의 개경 환도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삼별초가 진도, 제주도로 이동하여 항쟁을 전개하였다.
  3. 몽골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4. 이 시기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정답: 4번 – 이 시기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출처: 2023 국가직 9급]
Q2.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몽골 간섭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개경 환도 후 삼별초가 강화도, 진도, 제주도에서 저항하였다.
  2. 이 시기에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3. 몽골의 부마국 체제가 성립되었다.
  4. 공민왕이 즉위하여 반원 자주 정책을 실시했다.
정답: 1번 – 삼별초의 저항 지역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
[출처: 한능검 고급 2022년 51회]

 

Q3.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2. 고려 정부와 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3. 공민왕의 지원으로 최후까지 항전하였다.
  4. 몽골 간섭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무장 항쟁이었다.
정답: 3번 – 공민왕 시기는 삼별초 진압 이후임.
[출처: 2017학년도 수능]
Q4. [공무원 7급 / 지방직] 다음 중 몽골의 내정 간섭이 고려에 미친 영향으로 옳은 것은?
  1. 원 간섭기 이후 고려 왕이 원 황실과 혼인하였다.
  2. 정동행성 설치 등 원의 관제가 도입되었다.
  3.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 영토가 축소되었다.
  4. 이 모든 내용이 해당된다.
정답: 4번 – 모두 몽골 간섭기의 영향.
[출처: 2021년 지방직 7급]
Q5.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삼별초가 항쟁을 벌였던 주된 이유로 옳은 것은?
  1. 최씨 정권의 붕괴에 대한 반발
  2. 몽골과의 강화 조약 체결에 반대
  3. 개경 환도에 따른 항복 정책 반대
  4. 불교계의 개혁 반대
정답: 3번 – 개경 환도 및 항복 정책 반대가 주된 명분.
[출처: 한능검 심화 2023년 59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