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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강대국 사이에서 길을 찾은 장군, 백제의 흑치상지

by solutionadmin 2025. 9. 24.

흑치상지 장군이 당나라 군을 이끌고 성곽 앞에 서있는 모습 / 이미지 출처: 작성자 직접 제작(AI 생성), 저작권 보유 © 2025

나라를 잃은 뒤에도 길을 찾아 나선 장수가 있었습니다. 백제의 흑치상지. 그는 당나라에 귀부하여 명장으로 활약하며 7세기 동아시아 전장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국제 정세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7세기 동아시아, 그리고 오늘날의 한반도

나라를 잃은 장수가 명장이 되다?

“나라를 잃은 장수가 당나라의 명장이 되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보통 우리는 나라가 멸망하면 장수도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백제가 무너진 뒤에도 강대국 사이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이름은 흑치상지. 그의 삶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국제 정세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백제의 장군, 그러나 기록은 중국에만

놀랍게도, 『삼국사기』에는 그의 이름조차 없습니다. 우리 역사서가 침묵하는 사이, 중국의 정사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만 우리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흑치상지는 본래 백제의 장수였다. 나라가 망하자 당에 귀부하였고, 우무위장군에 임명되었다.” (『구당서』 권199)

단 한 줄. 그러나 그 한 줄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나라를 잃은 장수가 왜 적국이었던 당나라를 선택했을까요?

학자들이 본 선택의 이유

생존의 선택: 부흥운동은 실패했고, 내분까지 겹쳤습니다. 장수와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으로 가는 길뿐이었습니다.

집단의 보호: 그는 단순히 자신을 위해 간 것이 아니라, 당군에서 백제 출신 병사들을 거느리며 백제 유민의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당의 포섭 전략: 당은 백제와 고구려 유력자들을 적극 기용했습니다. 흑치상지는 이 틀 안에서 군사적 기반을 얻은 것이죠.

즉, 그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과 시대를 고려한 현실적 선택을 한 장수였습니다.

흑치상지 생애 궤적 도표

단계 시기 활동 의미
백제 장군 ~660년 구체 기록 없음, 장군으로 활동 이미 군사적 역량 입증
당 귀부 660년 이후 『구당서』에 “귀부 후 우무위장군 임명” 기록 생존과 집단 보호
당 장군 활약 665~668년 신라 공격, 고구려 평양성 선봉 당대 동아시아 전장의 주역
국경 전쟁 670년대 토번·돌궐 전쟁에서 공 당나라 명장으로 자리매김
최후 추정 689년 측천무후 숙청 시 사망 추정 역사의 공백, 미스터리

당의 전장에 선 흑치상지

귀부 이후 흑치상지는 ‘이름만 올려둔 망명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 전장에서 피와 땀으로 증명한 실력 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

665년, 그는 유인궤를 따라 신라를 공격하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습니다. (『신당서』)

668년, 고구려 평양성 공격에서는 “흑치상지가 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성에 올랐다”는 기록이 남습니다. (『자치통감』 권201)

평양성 전투는 단순한 성 하나의 함락이 아니었습니다. 대동강을 끼고 북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부로 이어지는 전략 요충지이자, 고구려의 수도를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당이 흑치상지를 선봉에 세운 것은 단순히 그의 무용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전투야말로 동아시아 최강국 고구려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전투였고, 평양성 함락은 곧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성 위로 가장 먼저 올라 깃발을 꽂는 장수, 그 이름이 백제 출신 흑치상지였던 것입니다. 그는 백제의 장군이었지만 이제 당의 전장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떠올랐습니다.

그 뒤에도 그는 투르크족, 토번(티베트)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당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백제 장수들과 달리, 흑치상지는 당대 동아시아 전장을 누빈 영웅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나 끝은 쓸쓸했다

그의 최후는 역사의 안개 속에 묻혀 있습니다. 『구당서』와 『신당서』, 『자치통감』은 모두 그의 전공을 기록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만 학계는 측천무후가 권력을 강화하던 시기, 측근의 모함으로 숙청당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흑치상지를 ‘백제 출신 명장’으로 찬양하지만, 또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신라의 눈에서 보자면 그는 당군을 이끌고 한반도 땅을 짓밟은 침략자였습니다. 또한 당 제국의 입장에서 흑치상지는 철저히 활용 가능한 인재였을 뿐, 필요가 사라지자 측천무후 정권의 숙청 속에 사라진 ‘제국의 도구’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웅인가, 제국의 부속품인가. 이 질문은 오늘날 강대국 속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을 단지 영웅이냐 도구냐로만 재단할 수 있을까요? 백제의 장군으로 태어나 당의 명장으로 죽음을 맞이한 한 사람. 그의 마지막 순간, 가슴 속에는 어떤 회한이 남아 있었을까요? 백제 땅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그는 끝내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요?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

안타깝게도 흑치상지는 한국 사서에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중국 사서 속에서만 빛나고, 우리 역사에서는 그림자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기록만으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흑치상지는 분명 7세기 동아시아에서 주목받은 장수였음을.

백제 멸망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당이라는 초강대국 속에서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강대국의 판 위에서 살아남은 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질문

지금 한국은 미·중 갈등, 일본·러시아, 북한 문제까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서 있습니다. 경제, 외교, 안보까지 모든 선택이 무겁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까요?

흑치상지의 삶은 우리에게 거울을 들이댑니다.

“강대국의 판 위에서도, 스스로 길을 찾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의 이야기는 과거의 한 장수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고민 그 자체입니다.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 던져집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