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가을이면 부여 일대에 북소리와 행렬이 울려 퍼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백제문화제’라 부르지만, 그 시작은 화려한 축제가 아니라 한 줌의 향불과 제사였습니다.
나라가 무너지던 날까지 백제를 지키려 했던 세 사람, 계백·성충·흥수. 그들을 기리는 제향(祭享)이 바로 백제문화제의 뿌리였습니다.
제가 몇 해 전 부여 충혼사 제향 현장을 찾았을 때, 제단 위로 천천히 오르는 향연기 속에서 “이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왕이었을까, 나라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믿은 ‘옳음’이었을까. 그 답을 찾아 삼충신의 최후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정사(正史)에 남은 삼충신의 마지막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 제6(의자왕 19~20년, 김부식 편찬)에 세 사람의 최후가 짧게 남아 있습니다.
① 계백(階伯)
「秋七月 百濟將階伯 以兵五千拒新羅軍於黃山原 戰敗死。」
(가을 7월, 백제 장군 계백이 5천 병력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았으나 패전하여 죽었다.)
→ 전장에서 결사 항전한 무장의 죽음.
② 성충(成忠)
「成忠諫王云 王怒囚之 忠自縊死。」
(성충이 임금에게 간언하자 왕이 노하여 가두니, 성충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 간언하다 옥중에서 자결한 문신의 죽음.
③ 흥수(興首)
「興首曰 成忠之言是也 王怒遠逐之。」
(흥수가 말하기를, “성충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멀리 내쫓았다.)
→ 유배된 뒤 행방이 묘연한 인물.
세 인물 모두 나라의 위기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백제에 충성했지만, 《삼국사기》는 단 몇 줄로만 그들의 죽음을 기록했습니다.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성충과 흥수는 ‘간언한 역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백제의 마지막 충신으로 남았고, 그 기억이 훗날 삼충신 제향과 백제문화제의 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설로 이어진 충절 ― 백성의 기억 속 삼충신
성충 ― 간언의 순절, 하늘의 징조
『여지도서(輿地圖書)』 부여현조에는 성충이 죽자 궁중의 거울이 깨지고,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는 임금의 사치를 막으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왕의 허물은 나라의 화요, 나의 죽음은 백성의 불행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목을 맸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의 충절이 삽화로 실려 ‘간언하다 죽은 충신의 전형’으로 도덕 교육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삼강행실도』나 『열녀전』에서 성충의 이야기가 반복된 것은 단순한 도덕 교화가 아니라, “왕보다 도(道)에 충성한다”는 유교적 의리관이 백제의 충신담으로 재해석된 사례입니다. 즉, 삼충신의 충절은 조선의 국가도덕 체계 속에서 ‘역사적 도덕 자산’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제가 부여 충혼사를 찾았을 때, 성충의 위패 앞에는 “忠以保國(충이로써 나라를 지키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면 마치 지금 시대의 공직자들에게 묻는 듯합니다. “당신은 옳다고 믿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있는가?”
흥수 ― 사라진 이름, 의리로 남은 사람
《삼국사기》에는 유배된 기록만 남았지만, 부여·공주·논산 일대에는 지금도 ‘흥수바위’, ‘흥수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며 계룡산 기슭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야사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성충의 시신을 수습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공주 흥수바위에 서면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 바람결 속에서 “의리를 지킨 사람의 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계백 ― 황산벌의 불꽃, 패배한 자의 충성
《삼국사기》에는 간단히 “패전하여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후대 『동국통감』과 『대동지지』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극적으로 확대됩니다. 패배를 예상하고 아내와 자식을 베어 수치를 막은 뒤, “내 몸은 죽어도 백제의 혼은 남으리라”고 외치며 황산벌로 나아갔다고 전해집니다.
논산 황산벌 유적지를 찾았을 때, 평야 끝에 서 있는 계백장군 동상은 해 질 녘 햇살을 받으며 붉게 빛났습니다. 그 앞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죠. 패배의 장수였지만, 백성들은 그를 영원한 충성의 상징으로 기억했습니다.
계백의 죽음은 무장의 충절, 성충의 죽음은 간언의 충절, 흥수의 죽음은 의리의 충절을 상징합니다. 세 사람의 죽음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나라가 무너져도 의리와 신념은 남는다”는 희망으로 전설이 되었습니다.
충신과 간신 ― 역사의 경계선
역사는 언제나 흑백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지만 조선 건국 후에는 역적으로 불렸고, 정도전은 개국공신이었으나 왕자의 난으로 반역자로 몰려 죽었습니다. 조광조는 개혁을 꿈꾸다 사약을 받았고, 민영환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했지만 당대에는 불충으로 오해받았습니다.
결국 ‘충신’과 ‘간신’의 경계는 권력의 입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정한 충신은 살아 있을 때보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인정받는 법입니다.
오늘의 충신과 간신은 누구인가
지금 우리는 왕도, 신하도 없는 시대를 살지만, 여전히 공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을 바로 세우는 공직자, 불의에 맞서는 내부고발자, 사회적 약자를 지키는 시민들 — 이들이야말로 현대의 충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삼충신은 이름 없는 곳에서 공익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내부 비리를 폭로한 공무원, 기후위기 현장에서 몸을 던지는 청년, 사회적 약자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변호사 — 이들이야말로 ‘현대의 성충·흥수·계백’입니다. 그들의 용기가 이어질 때, 충의의 향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국민의 눈을 속이고 사익을 좇는 자들, 책임을 회피하며 권력에 영합하는 사람들은 현대판 간신이라 불러야 합니다. 백제문화제의 제향은 단순한 전통 의식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는 윤리의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맺으며
삼충신의 죽음은 단순히 백제의 멸망으로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이름은 지금도 부여 충혼사 제단 위의 향불 속에 살아 있고, “진정한 충성은 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옳음에 대한 헌신”임을 일깨웁니다.
제가 제향을 마치고 노을 진 금강을 바라보았을 때,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은은한 피향이 흩날렸습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변해도, 충의(忠義)의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참고 사료 및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19~20년, 김부식)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2, 부여조
『여지도서(輿地圖書)』 권63, 부여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2책, 야사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충신편
『대동지지(大東地志)』 권3, 논산조
『열녀전(列女傳)』 조선후기 간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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