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부흥을 꿈꾼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과 좌절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사’ 전문 블로거입니다.
오늘은 고려의 마지막 자주 부흥을 꿈꾸었던 두 인물, 공민왕과 신돈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교과서 속 몇 줄에 불과한 기록 뒤에는, 원나라 간섭이라는 거대한 그늘과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저항,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의 개혁은 왜 실패했을까요? 그리고 그 실패가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요?
원나라의 그늘 아래, 무너진 고려
공민왕 즉위 전 고려는 약 100년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 원나라의 연호 사용과 왕의 원 공주와의 결혼
- 관제 격하, 막대한 세폐(금·은)와 공녀(貢女) 징발
- 권문세족의 불법 토지 점유와 노비 강탈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고 국가는 자주성을 잃었습니다.
어린 시절 원에 볼모로 끌려간 공민왕은 이러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며, 자주적인 고려를 되찾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니, 조정은 무너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공민왕·신돈 개혁 연표
연도 | 사건 |
---|---|
1351 | 공민왕 즉위, 반원정책 착수 |
1356 | 기철 일파 숙청, 쌍성총관부 수복 |
1365 | 노국대장공주 사망, 공민왕 정치 의욕 상실 |
1365 | 신돈 등용 |
1366 | 전민변정도감 설치 |
1371 | 신돈 처형 |
1374 | 공민왕 피살 |
공민왕의 개혁과 반원정책
공민왕은 즉위 직후 세 가지 핵심 조치를 단행합니다.
- 반원(反元) 정책 – 원 연호 폐지, 몽골풍 복장·변발 금지
- 영토 회복 – 쌍성총관부 무력 수복
- 친원파 숙청 – 왕비의 외숙부이자 권문세족 수장 기철 제거
이러한 개혁은 백성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으나, 권문세족과의 갈등은 깊어졌습니다.
특히 1365년, 사랑하던 노국대장공주가 출산 중 사망하자, 공민왕은 정신적 충격으로 정치적 의욕을 잃게 됩니다.
개혁의 파트너, 신돈의 등장
이때 등장한 인물이 신돈입니다.
천민 출신 승려였던 그는 기존 불교 세력과 거리가 있었고, 과감한 성격과 개혁 의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그에게 ‘국정 총리’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하며 개혁의 불씨를 되살립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變正都監)의 설치
- 목적 : 권문세족이 불법 점유한 토지·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
- 운영 : 도평의사사 산하 임시기구로, 왕명 직속 집행권 보유
- 성과 : 수천 명의 억울한 노비 해방, 토지 환급, 국가 재정 회복 시도
- 영향 : 훗날 조선 과전법(科田法)의 사상적 기반 제공
“신돈이 변정도감을 두어 부정한 것을 바로잡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야사와 진실 사이
조선 시대 사서에서는 신돈을 ‘요승(妖僧)’이라 부르며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이 유교를 국시로 삼았고, 불교 승려의 정치 참여를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돈의 개혁으로 피해를 본 권문세족의 후손이 사관으로 참여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일부 야사에는 궁중 여성과의 염문, 사치품 사용설 등이 등장하지만, 사료적 신빙성은 낮습니다.
개혁의 몰락과 비극적 결말
신돈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흔들었고, 그들의 정치적 보복이 시작됩니다.
결국 그는 역모 누명을 쓰고 1371년 처형됩니다.
공민왕은 정치에 더욱 무관심해졌고, 1374년 환관과 자제위에 의해 시해됩니다.
이로써 고려 말기의 자주 개혁은 막을 내립니다.
🏛 공민왕과 신돈의 흔적
- 공민왕릉(현릉) – 북한 개성, 노국대장공주와 합장
- 만월대 – 고려 궁궐터, 개혁의 중심 무대
- 보문사 터 – 신돈이 머물렀던 사찰
조선 개혁과의 비교
항목 | 신돈 개혁(고려) | 과전법(조선) |
---|---|---|
토지 환수 | 불법 점유 토지 환급 | 국가 소유 토지 분급 |
노비 해방 | 불법 노비 해방 | 공신·관료 노비 유지 |
기득권 반발 | 권문세족 | 일부 사대부 |
지속성 | 단기(5년 미만) | 장기(200년 이상) |
오늘날의 교훈
✔️ 개혁은 지도자의 강한 의지와 더불어 제도적·사회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 기득권의 반발을 이겨낼 정치·군사·경제적 힘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 비록 실패했더라도, 그 사상과 제도는 후대의 변화를 이끄는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 여러분은 신돈을 개혁가로 보시나요, 아니면 요승으로 보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가)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를 건의하여 권세가들이 불법적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되돌려 주었다.
(나) 성균관을 다시 정비하고, 유학자들을 등용하여 개혁 세력으로 삼았다.
(다)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갈등이 심화되자, 권문세족의 반발로 제거되었다.
제시된 개혁은 신돈이 주도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입니다.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결국 제거되었습니다.
이 왕은 원 간섭기 권문세족의 횡포로 무너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즉위 초 친원파 세력을 제거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며 반원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제시된 ‘이 왕’은 공민왕입니다. 공민왕은 즉위 후 기철을 포함한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했습니다. 노비안검법은 광종,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과 신돈, 과전법은 공양왕 때의 정책입니다.
고려 말 왕권 강화와 자주성 회복을 위해 (가)는 반원 정책을 추진하고, (나)를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모두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지문의 내용은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추진하며 개혁을 시도했고,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는 등 개혁을 이어갔으나, 결국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고,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제시된 자료는 공민왕 시기에 신돈이 주도한 전민변정도감의 내용입니다. 삼별초는 대몽 항쟁기에 결성되어 활동한 조직으로, 공민왕의 개혁 시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의 일환으로 친원파 기철을 제거하고, 몽골풍 복식과 변발을 금지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습니다. 정방을 폐지한 것은 최씨 무신 정권 시기인 최우 때 처음 설치되었으나, 이를 폐지하고 다시 설치하는 과정이 반복되다가 공민왕 때 최종적으로 폐지됩니다. 그러나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신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제시된 문제의 4번 보기는 정방을 폐지한 것 자체는 맞지만, 그 목적이 권문세족 견제라는 것이 공민왕의 주요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보기들이 명백하게 공민왕의 업적인 반면 4번 보기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정답으로 선정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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