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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공민왕의 위대한 반격, 잃어버린 땅을 되찾다 - 쌍성총관부 탈환 이야기

by solutionadmin 2025. 8. 7.

 

공민왕의 위대한 반격, 잃어버린 땅을 되찾다 - 쌍성총관부 탈환 이야기

고려 말, 몽골(원나라)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성이 흔들리던 암울한 시기.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잃어버린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은 왕이 있었으니, 바로 공민왕입니다. 무려 100년간 원나라에 강제로 빼앗겼던 땅,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그의 용기 있는 개혁과 반원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과연 공민왕은 어떻게 그 불가능해 보이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요?


몽골의 그림자, 고려를 덮다: 쌍성총관부의 비극적 탄생

고려 시대는 몽골의 일곱 차례에 걸친 침략으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결국 원의 부마국이 되어 주권을 훼손당했고, 그 아픔의 상징이 바로 쌍성총관부입니다. 1258년(고종 45년), 원나라는 지금의 함경남도 일대에 이 통치기구를 직접 설치하고 많은 고려인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명목상 고려의 영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원나라 관료의 지배를 받는 '반쪽짜리 영토'가 된 것이죠. 이로 인해 고려 백성들은 깊은 상실감과 분노를 느껴야 했고, 쌍성총관부는 고려 주권 상실의 가장 뼈아픈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왕관을 쓴 공민왕이 당당히 서 있고, 양옆에는 갑옷과 투구를 쓴 이자춘과 젊은 이성계 서있는 모습의 미미지

공민왕, 개혁의 칼을 들다: 반원 정책의 시작

이러한 비극적 역사 속에서 원나라의 인질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공민왕은 쇠퇴하는 원의 실상을 목격하고 자주 고려의 부활을 꿈꿉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과감한 반원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몽골식 풍습과 복식을 금지했으며, 원에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권문세족을 숙청했습니다. 또한, 백성을 위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습니다. 이 모든 개혁의 신호탄이자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쌍성총관부 회복이었습니다.


쌍성총관부 탈환 작전: 숨겨진 영웅들의 활약

1356년(공민왕 5년), 공민왕은 드디어 쌍성총관부 탈환을 위한 군사 작전을 단행합니다. 당시 원나라는 홍건적의 난 등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져 변방을 제대로 통제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고려군은 신진 무장들의 지휘 아래 북방으로 진격했습니다.

특히 이 작전의 성공에는 내부의 조력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원나라의 천호(관직)였던 이자춘(훗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아버지)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고려군에 가담하여 쌍성총관부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반면, 끝까지 원에 충성했던 총관 조소생과 조돈 등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훗날 조선 건국의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쌍성총관부 회복이 지닌 진정한 의미

쌍성총관부 회복은 단순히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은 군사적 승리를 넘어섭니다. 이는 원나라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고려의 자주정신이 실현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00년간 짓밟혔던 민족적 자존심과 백성의 희망을 되살린 이 사건을 통해 공민왕은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죠.

이처럼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회복은 어떠한 외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성과 주체성을 지키려 했던 용기 있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겨줍니다.


💬 독자 참여 코너: 당신의 생각은?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섭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어떤 교훈을 얻으셨나요?

  • 용기 있는 개혁 정신: 어려운 상황에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공민왕의 모습.
  • 자주성과 주체성의 중요성: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 했던 노력.
  • 시대의 흐름을 읽는 지혜: 이자춘과 이성계처럼 변화의 순간을 포착했던 인물들의 판단.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자유롭게 나눠주세요!

 

 

1. (국가직 7급 공무원, 2021) 다음은 고려 시대 어느 왕의 정책에 대한 설명이다. 이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1. ① 정방을 폐지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권문세족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2. ② 원에 대한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고, 천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3. ③ 재정 확보를 위해 소금 전매제를 시행하고, 화폐 발행을 통해 상업을 진흥시켰다.
  4. ④ 원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몽골식 복장을 권장하여 원의 풍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정답: ①
해설: 제시된 내용은 공민왕의 전민변정도감 설치에 대한 설명입니다. ①번은 공민왕의 개혁 정책인 정방 폐지와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②번의 쌍성총관부 공격과 함께 공민왕의 대표적인 반원 정책에 해당합니다. ③번은 충선왕의 정책이며, ④번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상반되는 내용입니다.

2. (한능검 심화, 49회) (가), (나) 사건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어 충렬왕이 즉위하다.
(나) 공민왕이 원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반원 자주정책을 추진하다.

  1. ①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2. ② 원의 내정 간섭으로 정동행성을 설치하였다.
  3. ③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4. ④ 원종이 즉위하여 몽골과의 화의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정답: ②
해설: (가) 충렬왕 즉위는 1274년, (나) 공민왕 즉위는 1351년입니다. 두 사건 사이의 시기는 원 간섭기에 해당합니다. ②번의 정동행성 설치는 원 간섭기에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이므로 사이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합니다. ①, ③, ④는 모두 원 간섭기 이전이나 초기 상황에 해당합니다.

3. (대학수학능력시험, 2017) 밑줄 친 ‘이 왕’이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이 왕은 원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지만,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변발과 호복 등 몽골 풍속을 금지하는 한편,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1. ① 훈요 10조를 남겨 후대 왕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2. ②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였다.
  3. ③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적 정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4. ④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정답: ②
해설: 제시된 내용은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번의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것은 공민왕의 대표적인 개혁 정책입니다. ①은 태조 왕건, ③은 성종, ④는 광종의 정책입니다.

4. (지방직 9급 공무원, 2019)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1. ① 원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하였다.
  2. ②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를 조사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3. ③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고, 정방을 폐지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4. ④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영토를 회복하였다.
정답: ④
해설: 공민왕은 반원 정책의 일환으로 원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1356년(공민왕 5년)에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은 쌍성총관부 회복 이후인 1359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두 사건의 선후 관계가 바뀌어 있습니다.

5. (한능검 심화, 46회) 다음 밑줄 친 ‘이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공민왕은 원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반원 자주정책을 펼쳤다. 그는 천령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여 이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고려는 원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고, 이후 공민왕은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 ①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 정권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2. ② 이성계 부자가 내응하여 고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3. ③ 윤관이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 9성을 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④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군을 크게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다.
정답: ②
해설: 밑줄 친 '이 사건'은 쌍성총관부 공격을 의미합니다. ②번은 쌍성총관부 공격 당시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과 이성계가 고려군에 협력하여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은 무신정변, ③은 고려 예종 시기, ④는 몽골 침입 시기(고종)의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