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드라마 〈탁류〉를 따라, 빨래터·주막·장터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조선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과 오늘 한국 사회의 숨은 가사·돌봄 노동을 함께 비추어 보는 글입니다.
이 글은 드라마 〈탁류〉를 통해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를 다시 보는 연재의 한 편입니다. 시리즈 전체 흐름과 다른 글들은 《드라마 〈탁류〉로 읽는 임진왜란 이후 세상·경강상인·치안·민생·왈패·지도 제작 논쟁까지 한눈에 보는 시대 가이드》에서 한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여성은 집에만 있었다?‘빨래터-주막-장터’로 보는 역사를 움직인 그녀들의 보이지 않는 경제력
임진왜란 이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탁류〉를 보다 보면, 화려한 상인이나 벼슬아치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드라마 〈탁류〉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상상해 본 가상의 시대극으로, 채만식의 동명 소설 〈탁류〉(일제강점기 배경)와는 별개의 설정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강가 빨래터에서 허리를 굽힌 여자들, 좁은 주막 안에서 상을 나르느라 쉴 틈이 없는 안주인, 장터 한켠에서 아이를 업은 채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들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조선 시대 장사와 생계는 남자의 몫”이라고 막연히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여성의 생계 노동이야말로 한 집안을 버티게 한 보이지 않는 기둥에 가까웠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 글에서는 〈탁류〉 같은 시대극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세 공간, 바로 빨래터 – 주막 – 장터를 중심으로 조선 여성들의 생계 노동을 다시 한 번 그려 보고자 합니다.
1. 빨래터 – 수다와 웃음 뒤에 숨은 ‘하루치 품삯’만큼의 노동
풍속화나 드라마 속 빨래터는 종종 수다와 웃음이 넘치는 장면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현실의 빨래터는 집안의 모든 빨랫감을 책임지는 중노동의 현장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의 일과를 떠올려 보면, 밥 짓기, 옷 만들기, 아이 돌보기, 제사 준비, 연로한 부모 수발까지 하루 종일 손을 놓을 틈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빨래는 특히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일이었습니다.
하루 품삯을 받는다 해도 쌀 몇 되 값에 불과했고, 한겨울에는 손가락이 터지고 동상에 걸릴 정도로 힘든 일터였습니다. 눈과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강가에서 얼음물을 튀기며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는 ‘집안일’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자기 집안 빨래만이 아니라, 남의 집 빨래까지 대신 해 주고 품삯을 받는 ‘품팔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 긷기·청소 같은 허드렛일까지 함께 맡으면서 하루 품값을 채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탁류〉 속 빨래터 장면을 떠올려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다 함께 떠들고 웃는 한가한 시간 같지만, 그 이면에는
“오늘 이만큼은 벌어야 저녁에 아이들 밥을 먹일 수 있다.”
라는 절박한 계산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지점을 상상해 보면, 빨래터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여성들의 중요한 일터로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2. 주막과 삯바느질 – 집 안과 집 밖을 오가는 생계 전략
1) 주막 안주인 – 손님 접대가 아니라 작은 ‘경영자’

조선 후기 장시(시장)가 발달하면서 길목과 마을 어귀마다 주막·점막이 촘촘히 생겨났습니다. 장을 오가는 상인과 나그네가 늘어나자, 밥과 술,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이 하나의 생계 수단이 된 것이지요.
문헌과 여러 연구를 보면, 이 주막을 실제로 꾸려 나간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비중이 여성, 특히 “주모”“주모님”으로 불리던 안주인들이었습니다.
남편은 장에 다니거나 농사일·심부름을 맡고, 안주인은 손님을 맞고 음식을 만들고 술을 내며, 외상값과 현금을 챙기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주모는 단순히 술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재료 수급과 재고 관리, 외상 장부와 수입·지출을 관리하던 작은 가게의 ‘경영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몸으로만 일한 것이 아니라, 머리로 계산하고 판단하는 지능적 노동의 주체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주모가 거친 말투로 손님을 상대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실제 삶 속에서의 주막 안주인은 재료를 얼마나 살지, 오늘은 얼마에 팔지, 어느 손님의 외상은 어디까지 허용할지 등을 결정하던 자영업자이자 가게 운영자에 훨씬 가까운 존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삯바느질 – 밤늦게까지 이어진 ‘야간 노동’
집 밖의 주막이 여성의 일터라면, 집 안에서는 삯바느질이 대표적인 생계 노동이었습니다.
몰락한 양반가 여성이나 가난한 집안 부녀자들이 남의 옷을 지어 주거나 기워 주고 품값을 받는 일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복처럼 까다로운 옷을 전문적으로 맡는 침선가도 있었고, 일반 옷을 지어 주며 생계를 잇는 여성들도 많았습니다.
양반 가문이 몰락해 토지와 노비를 잃게 되면, ‘가문을 지킨다’는 전통적 책임은 자연스럽게 집안 여성들의 생계 노동으로 옮겨갔습니다. 체면을 지키며 사는 대신, 밤늦게까지 삯바느질을 하고, 몰래 장터에 나가 물건을 팔면서 ‘양반 가문의 겉모습’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삯바느질의 중요한 지점은, 집 밖으로 자주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생계 수단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유교적 규범 때문에 여성의 잦은 외출과 장사에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하던 사회에서, 삯바느질은
- 체면을 크게 잃지 않으면서
- 아이와 집안을 돌보고
- 동시에 현금을 벌 수 있는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대안이었을 것입니다.
등잔불 아래에서 늦은 밤까지 바늘을 움직이는 모습은,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사실상 야간 노동에 가깝습니다. 그 한 땀 한 땀이 빚을 막고, 다음 달 쌀값과 아이의 학비를 마련하는 과정이었다고 상상해 보면, 그 노동의 무게가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3. 장터와 행상 – “남자들만 장사했을까?”라는 질문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장시와 시장은 점점 더 북적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이미지를 한 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사는 남자들이 하고, 여성은 집에만 있었다.” 이 그림은 과연 사실일까요?
풍속화와 기록 곳곳에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다니거나, 빗·비녀·바늘 같은 잡화를 파는 여성 행상(행상 아낙)이 계속 등장합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머리에 광주리를 인 채 시장을 오가는 여성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해산물과 젓갈, 마른 생선, 솜뭉치, 바늘·빗·비녀 같은 자잘한 물건들까지, 그녀들이 팔았을 물건 목록을 떠올려 보면 장터가 곧 ‘여성들의 이동식 가게’였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바닷가에서는 어부의 아내가 해산물을 이고 마을을 돌며 팔았고, 내륙에서는 나물·곡물·솜을 들고 다니며 물물교환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이익을 남기려 애쓰는 여성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일부 여성들이 직접 상업 활동에 필요한 권리를 매입하거나 상속받아 상업의 주체로 나서기도 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여성이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성은 경제 활동의 주변부에만 있었다”는 통념을 흔들어 주는 대목입니다.
만약 〈탁류〉의 카메라를 장터 한복판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다면, 저는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이고 올라온 행상 아낙, 아이를 업고 콩과 나물을 파는 농가 여인, 빗과 비녀를 팔며 소식과 유행을 전하는 방물장수까지…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장터를 커다란 ‘여성 일터’로 바꾸어 놓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남자들만 장사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조선 후기 장터는 조용히 이렇게 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다, 여성들도 분명히 장터의 한 축이었다.”
4. ‘가장’은 남자, 실제 생계 책임은 누구였을까
조선 사회에서 호적과 예법상 가장(家長)은 분명 남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연구와 사례를 종합해 보면, 남성이 신분과 체면, 과거 공부와 관직 생활에 집중하던 사이, 실제 가정경제를 지탱한 쪽은 여성인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 남편이 과거 준비와 관직 생활을 이유로 생업 책임을 집안 여성에게 사실상 떠맡길 때
- 전쟁·질병·빚으로 남성 노동력이 약해졌을 때
- 양반 가문이 몰락해 예전처럼 농지와 노비에 의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러한 상황에서 빈자리를 메운 것이 바로, 빨래터의 품팔이, 집 안의 삯바느질, 장터와 주막에서의 현금 수입이었습니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고, 이름이 기록으로 남지도 않았지만, 조선 여성들의 생계 노동은 가문과 가족의 생활을 끝까지 버티게 만든 최후의 안전망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탁류〉 속 여성 인물들을 단순한 비극의 조연으로만 보기보다는, 그 시대 경제를 실제로 움직인 숨은 주인공으로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나면, 그들의 분노와 눈물, 때로는 거친 말투와 돌발 행동까지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오늘의 ‘보이지 않는 노동’과 연결해 보기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조선 여성의 생계 노동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한국 사회와 겹쳐 보이는 장면이 많습니다.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비정규직·파트타임을 전전하는 여성들
- 돌봄과 가사를 전담하면서도 “일 안 한다”는 말을 듣는 이들
- 온라인·오프라인 소규모 장사를 병행하며 버티는 1인 자영업자들…
여기에 더해, 오늘날에도 일부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직장인들 가운데에는 “직장생활에서 살아남기만 해도 벅차다”는 이유로, 가사노동과 재테크·자녀 교육 같은 실질적인 경제·생활 운영을 배우자에게 거의 전적으로 맡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가장’이 남편이지만, 집안 경제를 실제로 굴리는 손이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조선 후기와 묘하게 닮아 있는 셈입니다.
〈탁류〉 속 빨래터·주막·장터를 따라가며 ‘조선 여성 생계 노동’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노동의 현장을 비추는 작은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다음에 〈탁류〉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 화면 속에서 어떤 여성 인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까요?
그리고 그 인물이 오늘 한국에 살아 있다면, 어떤 형태의 노동으로 가족의 삶을 지탱하고 있을지…
잠시 상상해 보면, 드라마도 역사도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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