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2 사극 〈은애하는 도적님아〉 첫 방송을 앞두고, 최참판댁·일두고택·삼은정·황매산 촬영지를 따라가며 조선에서 ‘선택’과 ‘이탈’이 어떻게 남겨졌는지 역사적으로 풀어봅니다.
서문
2026년 1월 3일 밤 9시 20분, KBS2에서 사극 〈은애하는 도적님아〉가 첫 방송됩니다. 도적이 된 여인과 조선의 대군이 영혼을 바꾼다는 설정은 판타지적 장치이지만, 이 사극이 붙잡고 있는 질문은 오히려 현실적입니다. 정해진 자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벗어날 것인가.
이미 앞선 글에서, 이 드라마를 계기로 왕이 되지 못한 대군과 왕들, 도월대군, 양녕대군, 연산군, 사도세자가 각기 어떤 방식으로 ‘운명’에 저항했는지를 인물 중심으로 살펴본 바 있습니다. 또 다른 글에서는 얼녀·서얼·의녀라는 신분을 통해, 조선 사회가 허용한 선택과 허용하지 않은 삶의 경계를 정리했습니다.
▶︎ [사극: 은애하는 도적님아] 드라마 속 도월대군부터 양녕, 연산, 사도까지, ‘운명’에 저항한 영혼들의 이야기
▶︎ 사극 ‘은애하는 도적님아’ 얼녀란? 조선 서얼·의녀 신분제 쉽게 정리
▶︎ 사극 ‘은왕의 아들이지만 ‘얼자’ 취급받다: 영조의 평생 콤플렉스와 조선 왕실의 숨겨진 신분 계급
▶︎ 사극 ‘은왕의 아들이지만 ‘얼자’ 취급받다: 영조의 평생 콤플렉스와 조선 왕실의 숨겨진 신분 계급
이번 글은 그 연장선에서, 이 사극이 선택한 ‘공간’으로 시선을 옮겨봅니다. 네 곳의 촬영지는 서로 다른 시대에 놓여 있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도와 질서 속에서 정해진 길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던 선택의 흔적이, 형태는 달라도 공간에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사라지지만, 선택의 흔적은 공간에 남습니다.

최참판댁: 흥망의 중심에서 드러난 사람의 가치
하동의 최참판댁은 『토지』를 위해 재현된 공간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허구의 공간’이기에, 조선 양반가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고, 시대의 부침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가치를 상징하는 무대로 기능합니다.
작가는 이 집의 흥망을 줄거리의 큰 축으로 두되, 토지는 늘 제자리에 있고 사람만 흘러간다는 사실을 반복해 보여줍니다. 가문은 무너지고 질서는 바뀌지만, 그 위에서 살아가고 스러지는 사람들의 생명은 끝내 가볍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드라마가 이 공간을 선택한 이유 역시, 인간의 선택과 생명이 중심에 놓인 서사를 강화하기 위함으로 읽힙니다.

일두고택: 칼이 아니라 인재 양성으로 시대를 벼텨낸 선택
함양의 일두고택은 조선 성종 대 학자 정여창과 연결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여창의 저항은 칼이나 반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칼이 아니라 학문을 택했고, 당대의 권력 대신 다음 세대의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으로 시대를 벼텨냈습니다. 출세보다 원칙을, 현재의 권력보다 이후의 질서를 준비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일두고택은 체제 안에 머물면서도 그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던 한 선비의 선택을 담고 있는 공간으로 읽힙니다. 누군가의 이탈이 바깥으로의 도주였다면, 정여창의 이탈은 안쪽에서의 거리두기였습니다.

삼은정: 뜻을 펼 수 없음을 알았던 시대의 결단
밀양의 삼은정은 190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안내됩니다. 1904년은 러일전쟁이 시작된 무렵으로, 나라의 외교·정치 질서가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습니다. 이 정자를 지은 이명구는 학문과 가문을 갖춘 인물로, 관직에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아간들 자신의 이상과 정책을 펼칠 수 없는 시대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그는 벼슬길 대신 고향으로 돌아와 삼은정을 짓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는 싸움이 아니라 물러남의 형식으로 나타난 이탈이며, 그 선택의 무게가 정자라는 공간에 남았습니다.
뜻을 펼칠 수 없는 시대라면, 나아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용기 있는 선택일까요.

황매산: 고려의 절터, 전설의 산, 그리고 철쭉의 아이러니
황매산에는 정사로 잡히는 고리도 있습니다. 산 남쪽 기슭에는 고려 시대 절터로 알려진 영암사지가 남아 있어, 황매산의 시간은 적어도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편 전설도 전해집니다. 위키백과 등에서는 무학굴을 무학대사 수도 전승과 연결해 소개하거나, 모산재 인근 득도바위를 최치원 수도 전승과 함께 언급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는 기록으로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전설·전승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이어진다는 사실 자체는, 황매산이 오랫동안 ‘사람들이 의미를 덧입혀 온 산’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황매산은 철쭉 관광으로 더 유명합니다. 고려의 절터와 전설의 산이, 지금은 가장 화려한 봄 관광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침묵과 은신의 시간이 현재의 찬란한 풍경 아래로 접혀 들어간 듯한 이 아이러니가, 드라마가 다루는 ‘이탈과 변신’의 정서와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과거의 은신과 침묵 위에 세워진 오늘의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 산의 어떤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남습니다.
맺으며
사극은 허구의 이야기를 빌려오지만, 그 이야기가 머무는 공간은 실제의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최참판댁은 허구로 재현된 공간이기에 오히려 사람의 가치를 선명히 비추고, 일두고택은 학문과 인재 양성으로 시대를 견딘 저항을, 삼은정은 뜻을 펼치기 어려운 시대를 감지한 물러남을, 황매산은 정사와 전설이 공존하는 산의 시간과 오늘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첫 방송을 보실 때 배경이 스쳐 지나가더라도, 그 공간이 품은 시간을 한 번만 더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사극은 장면을 넘어, 우리가 역사를 읽는 방식까지 조금 바꿔 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각 촬영지 관련 문화유산 정보
- 지자체 문화관광 홈페이지: 하동 최참판댁, 함양 일두고택, 밀양 삼은정, 합천 황매산 방문 안내
- KBS 및 드라마 〈은애하는 도적님아〉 관련 공식 안내: 제작 및 촬영지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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